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구름 Aug 30. 2019

벌새, 깊고 맑은 호수처럼

column review

Intro

대부분의 영화는 강물처럼 어딘가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벌새>는 마치 깊고 넓은 호수처럼 그 안에 모든 것을 담아내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멍하게 보다가 종국에는 빠져든다.


깊은 카메라

<벌새>가 장편 데뷔작인 김보라 감독은 카메라를 길고 깊게 쓴다. 핸드헬드가 거의 없는 눈높이의 정적인 화면을 즐겨 보여주는 카메라는 여운이 남는 부분과 지루해지는 부분에서 선타기를 한다. 다양한 인물의 조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서사에 비해 다소 플랫 한 화면은 밤과 낮, 빛과 어둠을 품으며 오히려 현실에 더 가까운 모습을 띈다. 쓸데없는 도전보다는 우직하게 보여줘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가려내는 화면은 138분의 긴 시간 동안 관객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카메라


넓은 이야기

<벌새>를 굳이 한 마디로 요약해야 한다면 '은희의 1994년' 정도가 될까? 이 영화는 명확하고 다부지게 오롯이 은희의 이야기다. 분명히 한 명의 인생을 담아내고 있음에도 <벌새>는 놀랍도록 넓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은희의 언니, 오빠, 엄마, 아빠에서 시작해 절친한 친구, 학원 선생님, 남자친구 등 필요 이상으로 많다고 생각될 정도로 등장인물을 늘어놓는 영화는 은희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엮어내며 왜 이 많은 인물들이 영화에 다 등장해야 하는지 끝끝내 설명해낸다. 아니 정확히는 보는 사람이 깨닫게 만든다. 14살의 은희가 상대해야 하는 이 많은 사람들은 사실 누구 한 명 현실과 동떨어져있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 각자의 94년, 혹은 14살을 돌아볼 때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결코 과하지 않다. 여전히 <벌새>는 어느 인생의 한 단면을 도려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한 해의 단면은 그토록 큰 것이 당연하다.

이야기


맑은 사람들

<벌새>의 서사가 이토록 길고 넓음에도 나름의 탄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다수의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등장하거나 과하게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은희와 관계를 맺는 캐릭터들을 애써 만들어내려 하지 않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은희가 있는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인물을 등장시키고, 은희와 주변 상황이 바뀌며 응당 사라져야 할 사람을 퇴장시킨다. 김보라 감독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벌새>는 은희의 동선과 마음의 흐름에 따라 관객들이 느끼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출연 분량을 조절한다. 이런 캐릭터 연출 때문인지 <벌새>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악역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은희의 입장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들은 그 시대에, 각자의 자리에 맞는 역할을 부여받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람들


서울 1994년

<벌새>는 다양성 영화 중에서도 제작비가 3억 수준에 불과한 작은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지금이 아닌 1994년의 서울을 담아낸다. 자연히 화면에 보이는 소품부터 배우들이 사용하는 말투, 시대적 분위기까지 많은 것들은 만들어졌다. 하지만 적은 제작비가 투입되었다고 해서 <벌새>의 화면 속 1994년이 어색한 것은 아니다. 은희와 친구들이 사용하는 가방부터 은희의 집안에 보이는 수많은 가전집기, 길거리의 풍경은 오히려 그 디테일에 감탄할 만큼 정교하게 1994년을 재현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서 은희가 겪는 1994년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의 한국영화 중 <벌새>만큼 1994년이라는, 혹은 1년의 시간을 의미 있게 서사 속에 녹여낸 작품이 있었는지 감탄하게 된다.

1994년


호수 같은 영화

결과적으로 <벌새>는 숲속에 조용히 자리 잡은 호수 같은 영화다. 그 내면을 들여다봤을 때는 간혹 격한 일도, 이해되지 않는 일도 일어나고 때로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감당하기 힘든 일도 일어나지만 결국 영화가 보여주는 은희의 삶은 그 모든 것을 흡수하고 담담히 나아간다. 1994년의 은희는 어쩌면 해가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라도 손가락을 움직이고 마음을 다져가며 더 깊고 넓은 사람이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런트 워, 좋은 배우들로 엮어낸 산만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