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언 일병 구하기, 개정판이 필요 없는 교과서

열한 번째 클래식

by 정세현
매거진 '언제나 클래식'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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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그래픽은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화면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다면 비싼 화면은 만들 수 있을지언정 좋은 화면은 만들 수 없다. 개봉 30년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여전히 전쟁영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이유는 장면장면 가득 차 있는 고민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재현한 초반 30분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하나의 장면을 만들 때 얼마나 깊게 고민하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다. 총을 맞고 뚫려버린 수통에서 물이 흐르다가 피가 흐르는 디테일. 팔과 다리 내장까지 다양한 부위가 잘려나간 병사들의 참혹함. 쉬지 않고 귀를 채우는 전쟁의 굉음까지 모든 것이 연출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비현실적이다. 내가 만약 그날 노르망디에 있었다면 이렇게 영화적인 기분이었을까? 스티븐 스필버그는 전쟁터를 너무나 생생하게 만들어낸 나머지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과감하게 오프닝에서 가장 규모 있는 전투씬을 담아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밀도나 흡인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어지는 세 번의 전투씬은 각각의 매력이 확실하면서도 시간을 끈다거나 낭비된다는 느낌이 없다. 중간중간 끼어있는 인물들의 대화와 상호작용은 정확하게 서사가 딛어야 할 곳을 밟으면서도 긴장감을 일으키는 전투씬 사이의 완벽한 숨구멍이다.


혹자는 성조기가 휘날리며 시작해서 성조기가 휘날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미국중심주의적 태도를 도마 위에 올리기도 한다. 물론 그런 면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영화의 작품성에 스크래치를 낼만큼 강력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항복한 독일군을 쏴버리고 농담을 주고받는 미군을 보여주며 전쟁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주인공 집단이 동료를 죽인 독일군을 풀어주고, 그 독일군이 돌아와서 또 다른 동료를 죽이고, 그 독일군을 측은하게 여겼던 업햄이 결국 그 독일군을 죽이는 흐름은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리한 장치다.


James, earn this.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끊임없이 개정판이 필요하다. 국어문법은 매년 바뀌는 부분이 생기고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역사가 다시 쓰이는가 하면 시대에 따라 물리법칙마저 바뀌기도 한다. 전쟁영화는 다양한 장르영화 중에서도 기술의 도움이 중요한 장르인 만큼 오래된 영화라면 입지전적 자리를 내어줄 법도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여전히 개정판이 필요 없고 대체제도 없는 전쟁영화의 교과서 그 자체다.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감독이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에 대한 고민이 화면에 충분히 들어가 있다면, 그리고 그런 장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영화는 클래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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