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천만 흥행공식의 변화

special column

by 정세현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흥행작 3위에 올랐다. 2024년 개봉한 <범죄도시4> 이후 무려 2년 동안 천만 영화가 없었던 충무로에 경사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왕과 사는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화이길래 천만 관객을 넘어 역대 3위 흥행작에 등극한 걸까.


1. 천만 영화의 필수조건, 영화의 힘

재미없는 천만 영화는 없다. 좋은 운을 타려면, 마케팅이 잘 되려면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한다. <왕과 사는 남자>는 분명히 재미있는 영화다. 많은 관객들을 눈물짓게도 했고 웃음 짓게도 했다. 유해진과 박지훈을 필두로 한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될 만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가 영화의 힘 만으로 1,600만 명을 동원할 만큼 완성도 높은 영화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YES를 외치기는 어렵다. 이전에 개봉했던 영화들 중에 다양한 관점에서 <왕과 사는 남자>보다 더 높은 완성도를 보유한 영화들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천만 관객의 언저리에도 닿지 못했다.

왕사남1.jpeg 영화의 힘


2. 무주공산 대진운

영화는 개봉일이 출발선이다. 나보다 조금 먼저 출발한 영화, 같이 출발하는 영화, 뒤에서 출발하는 영화들과 함께 달려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리고 경쟁자들이 나보다 우월하다면 내가 아무리 잘났어도 돋보이기 쉽지 않다. <왕과 사는 남자>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2월 11일 개봉하는 <휴민트>였다. 2월 4일 개봉한 <왕과 사는 남자> 정확히 한 주 뒤에 개봉하는 류승완 감독의 235억짜리 대작이었다. 결과는 <휴민트>의 자멸이었다. 류승완, 조인성, 신세경과 박정민까지 달고도 휴민트는 200만 관객의 벽도 넘지 못했다. 이후 <왕과 사는 남자>를 막아설 영화는 없었다. 3월 18일 <프로젝트 헤일메리>가 개봉하기 전까지 개봉한 모든 영화 중 30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호퍼스>가 유일하다.

왕사남5.jpeg 자멸한 <휴민트>


3. 공급자의 전폭적인 지원

KOFIC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는 재미있는 기능이 있다. ‘공정신호등’이라는 기능인데 영화 한 편의 상영점유율이 40%를 넘으면 노란색, 50%를 넘으면 빨간색으로 표시해 주는 시스템이다. 상영회차를 조정하는 공급자 영화관이 한 편의 영화에 상영관을 얼마나 몰아주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일인 2월 4일부터 상영점유율 46%로 출발했다. 이미 노란불이다. 2월 4일부터 4월 3일까지 59일 중에 <왕과 사는 남자>의 상영점유율이 40% 미만으로 떨어진 날은 단 7일뿐이다. 그나마도 5일은 2월 11일부터 15일까지 <휴민트>가 개봉하면서 잠시 뺐어간 퍼센티지다. 나머지 이틀은 영화가 개봉하고 두 달이 가까워진 4월 2일과 3일이다.


21일 동안은 상영점유율이 50%를 넘었다. 빨간불이다. 그중에 60% 이상도 무려 4일이다.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한 모든 회차 중 60%가 <왕과 사는 남자>였다는 말이다. 그나마 경쟁작이었던 휴민트가 1,520개 스크린으로 출발할 때 <왕과 사는 남자>는 1,658개 스크린으로 출발했다. 한 해에 이 정도 스크린 수로 출발선에 설 수 있는 영화는 5% 미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항준 감독의 사람 좋은 미소와 훈훈한 영화의 스토리 덕분에 <왕과 사는 남자>가 마치 언더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영화관과 배급사는 처음부터 <왕과 사는 남자>를 흥행작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고 <휴민트>라는 걸림돌이 제거되자마자 무섭게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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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플루언서 감독, 장항준의 존재

사실 3번까지는 기존 천만 영화들도 착실하게 지켜온 공식에 가깝다.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에게는 장항준이 있었다. 장항준이 충무로에서 탑티어 감독이냐고 묻는다면 <왕과 사는 남자> 전까지는 NO라고 답하는 게 당연했다.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 수 자체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왕과 사는 남자> 이전 가장 크게 흥행했던 영화는 <기억의 밤>으로 138만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다. 그렇다고 대단히 예술적인 작품성을 가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기도 힘들다. 장항준이 영화감독으로서 수상한 상은 제25회 우디네극동영화제 실버 멀버리 관객상이라는 이름의 상이 전부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라면 어떨까? <왕과 사는 남자>전에도 장항준의 인지도는 충무로 영화감독 중 단연 탑클래스였다. 다양한 예능, 유튜브, 라디오와 광고까지 출연하며 장항준만큼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린 국내 감독은 떠오르지 않는다. 박찬욱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국민은 있어도 장항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장항준이 영화를 내자 사람들은 궁금해졌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장항준이 아니라, 내가 아는 친근하고, 재미있고, 미워할 수 없는 인플루언서 장항준이 만든 영화가 궁금해진 거다.


여기에 SBS 라디오 '배성재의 텐'에 출연해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을 넘으면 지키겠다고 선언한 공약이 바이럴을 타며 영화 흥행에 기름을 부었다. 너도나도 장항준의 과거 발언과 태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예능과 인터뷰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는 장항준의 흔적은 영화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장작이 되었다. 인터넷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장항준의 존재가 없었다면 <왕과 사는 남자>의 불이 지금처럼 오래 지속되진 못했을 거다.


달라진 천만 영화 흥행공식

예전에는 좋은 영화, 대진운, 공급자 지원의 삼박자가 맞으면 천만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세 개가 맞기도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그런데 이제는 이 세 가지에 합쳐 한 가지가 더 필요해졌다. 관객들은 예전만큼 영화관에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관객들을 움직일 만한 새로운 동기가 필요하다. <왕과 사는 남자>의 경우에는 그 한 가지가 인플루언서 감독, 장항준의 존재였다. 물론 모든 영화가 그 길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천만 영화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없었던 무언가가 더 필요해진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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