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출까? 비출 거야 아마도
1. 예민한 아이
올해 입학한 유치원생인 첫 애의 담임 선생님과 우연한 기회로 (하원길에 퇴근하는 모습을 보고) 짧지 않은 담소를 나눴다. 늘 회사에서 급하고 짧은 통화로 마치거나 해서 진지하게 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아이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휴직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또 한 번 했다. 나의 휴직 시점과 맞물려 아이의 원 내 생활 컨디션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후문. 아무래도 잠이 참 중요하다는 첨언과 함께. 허긴 매일 같이 칼퇴를 해도 집에 오면 8시가 훌쩍 넘었고 필수적인 집안일, 정리 등을 마치고 재우면 10시 11시나 되어야 잤던 만 4세 아이. 게다가 새벽같이 몰래 일어나 출근하는 엄마의 인기척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바로 벌떡 일어나서 6 시건 7 시건 따라나섰던 아들놈. 지금은 4시 반 하원 후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6시쯤 저녁을 먹고 8시면 눕는 새나라의 어린이 루틴을 철저히 지키며 늦어도 9시면 기절하듯 잠드는 아이를 보면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엄마를 기다리며 버티고 힘들었나 싶어서 마음이 저리다. 잠만 잘 자도, 엄마가 해준 정성스러운 반찬에 맛있게 밥 먹고 어두워져서 놀이터를 지나쳐만 오던 지난날과 달리 친구들과 햇볕도 쐬고 한참을 달리고 놀다 들어오다 보면 예민함은 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겠구나, 하며 여러모로 개선된 아이의 성격과 현재의 패턴이 기본 루틴이 된 삶의 질에 대해 만족스러움과 감사함과 행복감이 들었다.
2. 만삭사진 촬영
조리원, 산부인과 연계로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 앨범은 모두 다 상술이고, 영업의 구렁텅이라는 말이 있어서 무료로 제공하는 범위까지만 받고 귀는 닫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만삭촬영을 했다. 다만 생각보다 촬영하는 내내 분위기도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재밌었고. 코로나 베이비였던 첫 아이 때는 해보지 않았던 촬영들이라 큰 애도 같이 찍어준다길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첫째! 하는 무드로 예쁜 옷도 사입혀서 촬영을 했다. 오늘 찍은 수십 장의 컷들 중 단 2장만이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 앨범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간단한 보정과 영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영상을 보고는.. 성장앨범 패키지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구성도 다양하고 콘셉트 옵션도 좋은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또 한 번 호구가 되나 싶은 생각이었지만. 막상 남는 건 사진이라는 생각과 제대로 된 가족사진 없는 우리 가족에게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결국엔 계약을 하고 말았다는 스토리.
3. 뭐든 경험케 하는 것이 곧 자녀를 위한 길
아이를 진심으로 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무언지 깊이 고민하고 행동한 적이 있나? 생각해 보니 내 마음 편하자고, 내 통제 하에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아이가 놀고 (그 기준이 진심으로 아이가 즐겁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함에도) 그것만으로 괜찮겠지 안일하게 생각하던 습관. 아이가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가? 나의 불안함을 터치하는 일이라면 하지 마, 안 돼, 위험해 등 말리기에만 급급했고 언성도 함께 높아지던 날. 뭐든 경험케 하면서 아이도 세상을 배우는 것임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말았다. 나의 불안을 가이드 삼아 떠난 아이의 경험 여정에는 즐거움보다는 통제가, 자유롭게 즐기기보다는 압박이 앞섰던 것 같다. 불안이라는 감정이 참 무서운 것인데, 주변 사람에게 전가되기가 너무도 쉽다는 것이다. 눈빛, 목소리, 뉘앙스 같은 사소한 것에서 전염되어 타인에게 아주 크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 얼마 전 캠핑카 여행을 갔다가 자갈밭을 뛰어다니는 아들이 두 번이나 넘어지고 멍이 들었다. 뛰지 않으면 넘어지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에 아이를 혼내고 자갈밭은 뛰라고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말로 아이를 강압적으로 훈계했다. 돌이켜보면 뛰라고 있지 않은 길이 있을까?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아이가 다치는 것이 싫어서, 넘어지고 멍들지 않았으면 해서 라는 이기적이고 엄마 중심적인 사고에만 집중한 나머지 뛰고 달리면서 즐거워할 아이의 행복을 빼앗은 것 같아 부끄러워졌다. 더 크게 넘어지지 않기 위해 넘어지면서 배워야 하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 왜 늘 말과 행동은 다르게만 나갈까. 순간 아이의 입장이 되어보니 이런 엄마 밑에서 성장한다는 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보가 되는 길인 것 같이 느껴져 자책감이 들었다. 이제 하지 마 대신 천천히 차근히 해봐, 다칠 것 같아 대신 다친다 해도 다시 일어나면 돼, 엄마 불안하게 하지 마 대신 네가 해보고 싶은 걸 마음껏 해봐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내가 되길 노력해 봐야겠다.
4. 1일 1 영화, 부(족하지 않고) 귀(한) 영화 누리기
출산일이 디데이 50일을 향해 가면서, 영원할 것 같던 이 자유도 끝이 곧 보임을 직감하곤 앞으로 자주 하지 못하게 될 일을 매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 듣는 것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 취미는 누구나 있지만, 매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누리는 일은 단순히 취미를 넘어 일상이 된다면 다소 루틴화에 대한 강박이 있을 순 있어도 꽤나 멋진 일이 될 것 같다. 영화에는 다양한 세계가 있으니까.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외출이 어려운 만삭 산모에게는 더없이 좋을 취미가 될 터. <패터슨>이나 <퍼펙트 데이즈>처럼 소소한 일상이 담긴 영화부터 시작해 하루의 에너지가 되어 줄 영화를 선별하고 관람하는 일에 매진해 봐야겠다.
5. 명상
고등래퍼 시즌 2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래퍼 김하온. 직업은 트래블러, 취미는 메디테이션, 독서, 영화 시청이라는 가사가 와닿았다. 인생이 여행과 다르지 않듯 여행자의 마음으로 산다는 멋진 직업 소개와 더불어 취미에 들어간 명상이라는 단어. 쉬워 보이지만 쉽게 하지만은 못하는 명상. 명상을 할 때 마음을 차분히 다스리고 생각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난이도가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고 제대로 명상을 해 본 적이 10여 년 전 템플스테이에 가서 체험 삼아해 본 일 말고는 없었다. 어딘가에 집중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다. 힐링, 치유, 휴식 이런 단어에 꽂혀버린 만삭 임산부라지만 이젠 명상까지 해보겠다고 다짐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내가 이 평화로운 자유시간 속에서 속박되어 있는 뭔가가 남아있다는 뜻일까? 다음 사사로그 조각일기에는 어떤 니즈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