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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SSAM Aug 02. 2019

나는 어떻게 듣고 있는가?

남의 말 듣기의 세 가지 유형 그리고 강연자의 이야기 관찰


교사들에게 방학은 여백을 즐기는 시기이자 배움의 시기이다. 배움도 여러 가지 경로로 할 수 있으나 각종 오프라인 연수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방법이다. 그러나 이 역시 쉽지 않다. 짧은 방학, 무더운 여름, 내가 배우고 싶은 주제, 연수장소와의 거리 등의 다양한 변수가 잘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만에 이러한 변수들을 맞추고 조정한 덕에 다행히도 좋은 연수를 받을 수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의 방학은 '말하기' 비중이 좀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연수에서는 온전히 '듣기'에 집중하다 보니, 나의 듣기에 대한 관찰을 하게 되었다. 강연자에 따라 청중의 듣기가 달라질 터인데, 이 글은 순전히 나의 듣기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되었다. 듣기에 대한 관찰은 자연스럽게 강연자의 말하기에 대한 추적을 동반하게 되었다. 추적이 곧 비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야기할 듣기의 유형의 전제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모든 듣기는 '마음으로 듣기'로부터 시작한다. 둘듣기의 유형들은 동시에 이뤄지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적어도 이번 연수에서는 그러했다.


귀로 듣기
머리로 듣기
몸으로 듣기




귀로 듣기

우리는 당연히 귀로 듣는다. 물론, 귀가 있어도 듣고 싶지 않은 말들, 관심 없는 말들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관심이 있어서 찾아간 연수에서는 일단 귀로 이야기들이 들린다. 문제는 귀로만 듣는 오래갈 수 없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조만간 유체이탈 상태가 되거나 귀로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기 쉽다. 이번 연수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원인은 두 가지. 하나는 스스로를 점검해 볼 일이다. 자신이 강연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준이 안되었거나, 관심사가 아니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 탓에 들리지 않는 경우다. 혹은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우이기도 하다. 즉, 귀로 듣기는 마음으로 듣기를 전제로 한다. 내가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들리기도 하고, 들리지 않기도 한다. 한편, 강연자가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좋은 연수에 초청된 강연자들이 입으로만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청중에게는 그렇게 판단되기도 한다. 청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알맹이 없는 이야기를 지속하는 경우, 무논리, 무경험을 장황하게 얘기하는 경우가 이러한 유형에 해당한다. 사실상 우리는 뉴스에서 이런 유형의 말하기를 많이 경험하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귀로만 들을 뿐이다. 때로는 귀로도 들리지 않는다.



머리로 듣기

귀로 들어온 이야기들은 대체로 머리로 듣게 된다. 강연자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혹은 적용되는지를 생각하며 듣는 것이다. 빈틈없는 논리로 이야기하는 강연자에게 빨려 드는 경우도 머리로 듣기의 결과이다. 머리로 듣는 것은 행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인식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연수에 이런 유형의 말하기와 듣기가 자주 등장한다.


머리로 듣는 것은 강연자가 머리로 이야기한 결과이기도 하다. 강연자가 머리로 이해하고, 통찰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청중은 강연자의 논리를 좇아가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강연자가 머리로 이해한 것들을 청중이 머리로 듣고 이해하였으나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반드시 공감 가는 것도 아니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의 울림이 없는 경우도 많다. '아, 그렇구나'에 머무는 듣기도 얼마나 많은가?



몸으로 듣기

사실상, 이 글은 이 유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쓰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입장, 몸과 머리를 분리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몸으로 들을 수 있는가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연수에서 몸으로 듣기가 이뤄지고 있음을 느꼈다. 교육을 통해 마을을 변화시켜가고 있는 실천가의 입을 통해, 머리를 통해, 깨달음을 통해 그리고 실체가 있는 경험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 나는 확실히 몸으로 듣고 있었다. 몸으로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만 듣는 것과는 다소 다르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면 귀와 머리 그리고 몸과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듣기였고, 강연자의 이야기와 내가 일체화된 듣기였다. 감동이나 감흥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다. 실천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 안에는 디테일이 살아있었다. 그리고 청중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이쯤 되면 몸으로 이야기하는 강연자가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청중에게 필요한 듣기가 꼭 이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때에 따라서는 귀로, 머리로, 몸으로 듣기가 각각 필요할 때가 있다. 또한, 강연자가 의도한 이야기와 청중의 듣기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청중은 자신의 마음을 통해 듣기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 강연자의 이야기가 달리 들릴 수 있다. 따라서 강연자 못지 않게 '듣기'를 수행하는 청중의 역할과 책임도 크다. 강연자의 이야기 스타일과 직업 유형을 연결할 필요는 없다는 것도 전제되어야 한다.


끝으로 나의 듣기가 온전한 마음에서 시작하였는지 되돌아 본다. 그리고 청중에게 필요한 듣기를 생각하며 어떤 강연자로 나설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입으로만 이야기하는가?

나는 머리로만 이야기하는가?

혹은 나는 마음으로만 이야기하는가?

실제의 깨달음을 통해 머리로, 마음으로, 그리고 입으로 이야기하고 있는가?


나를 되돌아보며 이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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