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안 먹어?
한국에서 나의 일반적인 점심시간. 9시 출근하자마자부터 점심은 뭘 먹을지, 오늘은 회사사람들이 아닌 어떤 다른 근처 직장인 친구와 밥을 같이 먹을지, 근처 레스토랑 정보와 핸드폰의 전화번호부를 뒤진다. 12시 땡! 하면 쏜살같이 달려 나가 뜨거운 국물과 밥, 반찬이 가득한 직장인들의 인기 밥집에서 점심을 든든하게 챙겨 먹고, 오는 길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쪽쪽 마시면서 회사로 들어간다.
그렇다. 직장인인 나에게 점심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같은 팀 회사 동료들과 먹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근처 맛집을 탐방할 수도 있고, 콧바람도 쐴 수 있고, 커피 한 잔을 사 먹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매우 소중했던 거다.
미국에 온 뒤, 나의 점심시간은 180도 달라졌다. 그들은 점심시간에 나를 챙기지 않았다.ㅋㅋㅋㅋㅋ
그들은 점심을 대충 때웠다!
이 중요한 점심시간을, 이렇게 날린다고? 진짜로?
점심시간이 되자 어김없이 울려오는 나의 배꼽시계. 당시 키가 큰 편인 남자 동료와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되어도 밥을 먹으러 나가자는 소리를 하지 않는 거다. 배꼽의 재촉에 결국 나는 점심은 어떻게 할 예정이냐고 물어봤다.
아, 나는 스낵을 가져와서 이걸 먹으려고. 배고프면 점심 먹고 와!
그는 랩탑 옆에 놓인 조그마한 스낵 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엥? 저거 과자 아냐? 저게 점심이라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친구는 항상 같은 스낵을, 같은 조그마한 통에 넣어와 일을 하면서 중간중간 먹었다. 그 키가 큰 친구가 말이다.
한국 직장인들에게 점심은 매우 소중하다. 오죽하면 '직장인 맛집'이라는 키워드도 있겠는가. 하지만 미국인 동료 대부분은 점심에 대충 스낵, 요거트, 샐러드, 샌드위치 등으로 때우고, 그것도 본인 책상에서 일을 하면서 먹는 경우가 많다.
이제 나는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거나, 회사 식당에서 샌드위치를 사 와 내 자리에서 먹는다. 그리고 어느덧 이게 더 편해졌다. 물론 밖에서 먹는 점심도 맛있고, 즐겁지만 내향형 인간인 나에게 한국식 점심시간은 에너지 충전과 함께 소모가 동시에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직장 상사와 먹는 점심은 소화 불량이 일어날 만큼 불편하기도 했다.
'그들이 점심시간에 나를 챙기지 않았다'는 내 말에 대해 약간의 해명과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들이 나를 챙기지 않았던 건 아니다. 실제로 첫 입사 후 점심은 모두가 함께 했고, 중간중간 팀 런치도 종종 있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한국처럼 점심시간이면 항상 우르르 같이 나가서 한식으로 푸짐하게 먹고 우르르 같이 들어오는 그 문화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점심시간은 그저 간단히 한 끼 해결하는 시간일 뿐이고, 12시 땡 하면 나갔다가 1시까지 들어와야 하는 획일화된 시간도 아니다. 대신, 일을 하다가 본인이 원할 때 알아서 챙겨 먹는 자율적인 문화다.
어느 날, 우리 팀은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유명한 샌드위치 체인점으로 향했다. 나는 샌드위치 하나를 주문했다. 그러자 직원이 묻는다.
이게 다인가요?
뭘 원하는 거지? ㅋㅋㅋㅋ 더 주문하라는 건가? (실제로 모든 레스토랑에서 무조건 물어보는 말이긴 하다. 주문이 끝난 건지,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네, 그게 다예요.
그러자 동료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물어봤다.
음료수 안 마셔?
우리는 메인 메뉴 하나만 시키는 데 익숙하다. 물론, 샌드위치 전문점이나 햄버거 집은 따로 음료를 같이 시키는 경우도 많지만, 나는 워낙에 그냥 하나만 시키는 편이었어서, 음료를 사는 게 뭔가 돈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물 마시면 되니까...
하지만 콤보가 익숙한 그들에게 음료를 시키지 않는 내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이상한 건 내 눈에도 들어왔다. 내 보스가 샌드위치를 주문한 뒤, Chips, 칩을 집는 거다. 이걸 목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점심 먹는데 과자를 같이 먹는 거지?
내 보스가 칩을 정말 좋아하나 봐. 오늘 점심 먹으러 샌드위치 집에 갔는데, 칩을 같이 먹더라고. 근데, 내가 그걸 여러 번 봤어.
집에 돌아온 나는 별생각 없이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
그게 미국 문화야!
엥?
미국엔 우리처럼 반찬이 없잖아. 그렇다고 하나만 먹기엔 뭔가 지루한 거지. 이것저것 먹고 싶잖아. 그래서 우리는 콤보가 익숙해. 햄버거 먹으면 감자튀김이랑 음료를 같이 먹고, 샌드위치에는 칩, 그리고 음료를 같이 먹는 거지.
그러고 보니, 서브웨이나 어느 샌드위치 전문점, 심지어 우리 회사 식당에도 감자칩, 도리토스 등등 다양한 종류의 칩이 늘 구비되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점심=밥이라고 생각하니 메인 메뉴와 과자의 조합이 이상해 보였을 수 있지만, 이들은 밥을 먹지 않는구나. 그리고 칩은 그저 메인 메뉴에 곁들여 먹는 '사이드'였던 거다.
이렇게 또 한 가지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