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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Sep 18. 2020

내 인생 두 번째 냉장고 고장

쿠바는 나에게 왜 이래?


쿠바에서나 볼 수 있는 골동품 세탁기가 고장 난지 한 달 조금 넘었고 고장난 거실 선풍기가 집주인의 손에 거의 한 달 만에 고치다 만 채로 온 지 하루 이틀 되던 날이었다. 저녁에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뭔가 평소와는 다른 차갑지 않은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원래도 냉장고 냉동실은 과하게 어는데 비해 냉장실은 그것만 못한 성능을 자랑하던 우리 집 오래된 냉장고. 쿠바에 살다 보면 종종 겪는 단전의 상황을 알기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단전이 되었다가 다시 켜졌다 싶었다. 게다가 냉장실 문을 열면 불이 켜지긴 했다.


이상하다. 이렇게 안 좋진 않았는데...


그리고 냉동실을 열어보니 차가운 것은 그대로였지만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냉장고의 냉동실 쪽 옆구리를 만졌다. 작년 12월에 이 집에 이사 온 이후로 우리 집 냉장고는 항상 왼편 상단이 뜨거웠다. 근데 지금, 뜨겁지가 않다.


열정을 갖고 열 일하던 냉장고가 사망한 것인가??



다급히 A를 불렀다.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냉장고 문을 열지 말라고 했다. 아무래도 남은 냉기라도 냉장고가 품고 있게 하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오늘 밤은 어떻게든 버텨야 하고 내일 집주인에게 말하기로 했다. 반년 넘게 산 나에게 얼마 전에 집세를 일 단위로 계산하던 집주인의 어이없는 행태에 혀를 내두르고 나서는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모든 연락을 A에게 일임한 상태. 걱정을 가득 안고 잠을 청했다.




난 냉장고 고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2년 전, 칸쿤 친구 집에 두어 달 살 때 친구가 캐나다에 일주일 다녀오기로 하고 내가 친구 반려견과 함께 단 둘이 있기로 한 때였다. 출발일 전 날 냉장고가 고장 나서 3일을 개고생 한 기억이 떠올랐다. 멕시코는 편의점 옥소(OXXO)에 가면 스티로폼으로 된 아이스박스도 살 수 있고 얼음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쿠바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냉장고의 식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걸까?


아침부터 머리가 아팠다. 다른 건 몰라도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들을 이제 더는 이대로 둘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 중 김치 외에는 대부분 장류라 상온에 하루 이틀 정도는 둬도 괜찮았지만 냉동실이 문제였다. 고민 끝에 실례를 무릅쓰고 만두 언니에게 연락했다. 아침 시간이라 혹시 몰라 장문의 문자를 보냈는데 1분도 안 돼서 바로 온 전화.


“냉동실에 자리 있으니까 편할 때 가지고 와요.”


어찌 된 것인지 이것저것 묻지도 않으셨다. 쿠바에 온 이후로 이렇게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을 받았던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언니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받았다. 특히 어떤 질문도 없이 바로 연락 주셔서 더더욱 그랬는지도.


만두 언니는 쿠바에서 우연히 알게 된 분인데 뭐든 부족한 나라 쿠바에서 신기하게도 만두를 만드시는 분이다. 정말 곱고 예쁜 이름을 갖고 계시지만 지켜드려야 하니 만두 언니라 칭하기로. 호칭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만두 언니에 대한 호칭을 00님에서 00 언니라고 했을 때, 무슨 언니냐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난 엄마뻘 정도 된 분이라도 언니라 부르고 그 이상은 선생님이나 여사님 등 다른 호칭을 쓴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언니 오빠라는 호칭은 다들 좋아하시니까. 사람 가려가면서 본인보다 나이가 많아도 사회적 지위나 가진 것을 기준으로 누구는 언니고 누구는 아니고 그러는 사람도 있지만 난 그런 아니라고 본다.


그렇게 만두 언니네 집으로 냉동실에 넣을 식재료들과 김치를 들고 갔다. 반갑게 맞아주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뭐라도 드릴게 없을까 싶어서 마늘짱아찌와 한국산 조청쌀엿을 조금 담아드렸다.


“편할 때 언제든지 가지러 와요.”


언제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만두 언니. 만두 언니와의 대화는 그래서 존중받는 기분이 들고 간혹 오래 가슴속 깊이 남는 것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거늘, 말 하나를 해도 상대방이 기분 상할지 안 상할지 생각하지 않고 바로 내뱉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상대방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 다른 사람도 있더라. 내 험담을 어마어마하게 하고 다닌 사람에 대해 말했더니 만두 언니가 너무나도 현자스러운 말씀을 해주셨다.


“자기 일이 잘 안 풀리니까 다른 사람 험담을 하는 거죠. 자기 생활에 문제없으면 그러지 않아요.”


험담은 타인에 대한 질투에서도 비롯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안 풀리는 문제가 있을 때 남을 깎아내리면서 그릇된 방법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는 것일지도.




나머지 냉장고에서 구제해야 할 것은 바로 소중한 계란이었다. 엊그제 한국으로 가시는 나눔 천사 C오빠에게 계란까지 받았는데 그걸 지켜야 했다. S도 같은 비행기로 내일 출국할 예정이라 오늘만 신세 질 수 있었다. 내일 어떻게든 냉장고를 고친다는 가정하에 S네 집으로 계란을 보냈다.


이제 급한 불은 껐다.


아침에 A는 집주인에게 연락했고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술자를 찾아봤는데 못 찾았어.”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결국 A가 물어물어 냉장고 고치는 기술자를 찾아다녔다. 쿠바는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다. 미리 기술자의 연락처라도 알고 있었으면 좀 수월했을 텐데 쿠바에 코로나가 시작된 후, 국경 봉쇄가 되고 더더군다나 아바나는 대중교통도 올 스톱된 상황에서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기술자를 구해야 했다.


뭐든 해내는 A는 기술자를 찾았다고 했다. 냉장고의 전원을 끄고 냉기를 모두 없앤 후 전원을 켜면 켜질 수도 있으니 먼저 해보라고 기술자가 말해줬단다. 그것도 안되면 다음 날, 기술자가 출장 오겠다고.


난 한시라도 얼른 고치고 싶은데 이게 과연 될까?
아니올시다에 한표!



5시간 넘게 기다린 후 밤이 되어서야 냉기를 뺀 상태에서 다시 전원을 켰다. 역시나 실패. 결국 기술자가 집으로 오기로 했다. 집주인에게 냉장고 수리비용을 이야기하니 기함하며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오면 뭐가 달라지나?
어떻게 서든 깎아보려는 심산일 테지.


오전에 A가 S네 집에 가서 계란과 S가 남기고 간 소소한 식재료들을 들고 왔다. 작별인사는 엊그제 성대하게 했으니 아쉽지만 우린 카톡으로 사이버 만남을 이어가기로. 작은 캐리어에 A가 구해온 얼음을 넣고 냉장을 꼭 해야 하는 것들과 계란을 넣어뒀다. 아이스박스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기술자 아저씨는 낮에 우리 집에 도착하셨다. 무거운 장비를 드는데 A가 도와드렸다. 아저씨 말로는 가스를 주입해야 한단다. 그것 때문에 냉장고 가동이 되지 않은 거라고. 집주인이 가고 나서 여쭤봤더니 이미 한 두 번 가스가 주입된 상태로 거의 10년 가까이 된 냉장고란다. 오래된 모델인 데다 10년 가까이 쓴 냉장고를 새로 연 까사(숙소)에 들여놓다니. 언제든 고장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세탁기와 냉장고. 집주인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렇게 가스 주입에 시간이 필요해 12시부터 시작된 냉장고 수리는 4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뭐라도 마실 것을 드리고 싶었는데 물보다 커피를 원하셨던 아저씨. 달고나 커피를 만들어 드렸더니 맛있다고 좋아하셨다. 괜스레 어깨 으쓱! A는 달고나 커피에 대해 아저씨에게 설명해드렸다.


“이게 한국에서 유행하는 달고나 커피라는건데.... “


수리가 다 끝난 후, 장비 나르는 것을 도와드리고 아저씨와 헤어졌다. 전동 자전거를 타고 떠나신 아저씨. 부자인 듯. 쿠바에서 전동 자전거라니!


집안 청소를 하는데 싱크대 바닥 근처가 물이 흥건!

집주인 연락처 들고 바로 문제 생겼다고 이야기하려는데 물줄기의 뿌리를 따라가 보니 얼음을 넣어둔 캐리어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휴 놀래라. 전에도 싱크대 아래쪽에 물이 샌 적이 있어 식겁했다.



이제 더는 고장 나는 것들이 없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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