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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유 Sep 22. 2020

말레꼰 일몰, 오랜만이야

4개월 만에 본 쿠바 말레꼰 일몰


쿠바에 코로나가 시작된 3월 이후 대중교통이 올 스톱되더니 7월이 되어서야 대중교통이 다니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가 어느 정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쿠바는 확진자가 많다 해도 100명 이하 수준이고 평균 50명 남짓, 적을 때는 20명 내외, 게다가 0명을 찍은 날도 있으니 다른 중남미 국가에 비해서는 굉장히 선전하고 있었다.


종종 우리 집 테라스 문을 활짝 열었을 때도 예쁜 노을을 볼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뭔가 탁 트인 일몰을 보고 싶었다. 말레꼰까지 걸어서 5분 거리인데도 괜히 나돌아 다니다가 불미스러운 일 겪을까 봐 자중하고 있었는데 버스며 택시가 다니기 시작한 후로 슬금슬금 나갈 생각이 생겼다. 사실 통제를 심하게 할 때는 말레꼰의 낚시꾼도 제재했던 것을 보면 말레꼰에 멀뚱멀뚱 앉아있다가 경찰한테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난 A가 할 일이 다 끝났을 무렵, 말레꼰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리 집 근처의 말레꼰이라고 말은 안 했어도 의례 거기라고 생각하고 갔던 것 같다.

말레꼰은 스페인어로 방파제, 둑, 제방이라는 뜻인지라 일몰 명소로 유명한 쿠바 아바나의 말레꼰은 점이 아니라 선으로 쭉 이어진 해안가 방파제다. 고로 정확한 지점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도대체 말레꼰 어디서 만나자는 거냐” 할 수가 있다.


이게 얼마만이지? 거의 4개월 만이다. 말레꼰.
두근두근. 오늘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말레꼰 가는 길


그렇게 성큼성큼 말레꼰으로 다가갔다. 누르스름한 빛이 나를 반기는 것 같았다. 중간중간 사람들의 실루엣이 나를 부른다. 말레꼰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저기 사람들이 앉아있는 모습 때문이다. 아무도 없다면 그건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바닷가 방파제다. 말레꼰의 멋진 일몰은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4개월만의 말레꼰


먼저 말레꼰에 도착한 나는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A를 기다렸다. 해 질 녘의 캐리비안의 햇살은 따뜻했다. 다만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 않아서 해는 곁눈질로 봐야 했다. 오래지 않아 A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집에서 볼 때보다 더 반가웠다. 그렇게 우린 말레꼰 어느 곳에 앉아 별스럽지 않은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일몰을 기다렸다. A에게는 이 일몰이 일상이라 더 별스럽지 않았을게다. 나에겐 오랜만의 나들이에 반가운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쿠바 말레꼰의 기차 모습의 대중교통


해지기 전 기차가 지나간다. 말레꼰을 따라 운행하는 기차모양의 대중교통인데 꽤 탈만하다. 작년 11월에 타고 안 타봤던 것 같다. 괜스레 기차도 반가웠다. 코로나 전과 후의 다른 점은 관광객이 없다는 것뿐. 돌아다니는 사람이나 기차 안에 탄 사람이나 모두 쿠바 사람들뿐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말레꼰을 따라 운동하는 모습에 스스로 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긴 했다. 잠깐 뿐이었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아름다운 모습
쿠바 아바나 말레꼰의 일몰


구름이 하늘의 70%를 뒤덮었지만 지평선 근방에서 해를 볼 수 있었다. 운이 참 좋지. 오랜만에 말레꼰에 나와서 일몰을 볼 수 있었으니까. 날이 안 좋을 때는 해 보기도 어려운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해는 그렇게 바다 아래로 들어가 버렸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A와 함께 큰 대로를 건너 집으로 가려는데 길을 건넌 후 뒤를 돌아본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몰 후의 아름다운 말레꼰의 하늘
일몰 후의 말레꼰 하늘을 바라보며


해진 후의 하늘은 때로 해지기 전의 하늘보다 아름다울 때가 있다. 이날이 그랬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말레꼰의 일몰


해가 진 후 10-20분 정도는 하늘이 변하는 모습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 배고파하는 A를 위해 서둘러 집에 가려고 했었는데 결국 조금 더 머물러야 했다. 지금이 가장 예뻐서. 그냥 집에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레꼰을 바라보다 큰 선물을 받고 기분 좋게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말레꼰을 찾았다. 이 날은 적란운이 눈에 띄게 나를 반겼다. 다양한 동물 모양의 구름도 귀여웠다. 이 날은 구름이 열 일했고 일주일 전보다 일몰 때 붉은 기운이 더 깊었다. 구름으로 인해 생긴 강렬한 빛 갈라짐으로 인해 색이 달랐기 때문에 더 예뻤다. 해를 보진 못했지만 이걸로도 충분했다.


적란운과 동물 모양의 구름이 만들어낸 말레꼰 일몰


4일 후 다시 찾은 말레꼰. 이 날은 A가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스레 오랜만에 보는 친구처럼 반가웠다는. 이날도 지는 해를 보지 못했다. 지난번보다 구름은 덜 했지만 빛 갈라짐은 더 은은했다. 한 줄기 햇살이 비치지 않았던 곳은 마치 조명이라도 쏜 것 같았다.


은은하지만 아름다웠던 말레꼰 일몰


일몰을 볼 때 해를 꼭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가 지면서 변화하는 하늘의 색, 간혹 구름이 만들어내는 장관이 더 경이로울 때가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보다 구름 낀 날에 하늘이 더 울긋불긋 불타오를 때가 많다. 매일이 다른 일몰은 그렇게 일상적이지만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찾아온다.


매일 보는 일몰이 어느 날에는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말레꼰을 지척에 두고도 코로나 때문에 쓸데없이 돌아다녔다가 문제가 생길까 봐 못 나왔던 4개월. 7월 한 달 동안 말레꼰에서 3번의 일몰을 봤다.


나에겐 모든 순간순간이 예쁜 선물이었다.

8월에는 잦은 비에 폭풍이 몰아치더니 9월에는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저녁 7시부터 밖을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더는 말레꼰으로 일몰을 보러 갈 수가 없어 더 그때가 사무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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