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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부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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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내 나이가 도저히 올 것 같지 않던 아버지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때 말이다. 당황스럽고 야속하다. 이쯤되면 시간은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그때 아버지가 느꼈을 마음이 이런 것이었을까? 지금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런 날이 있다.

조금씩 쑤시던 다리나 불편했던 허리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때 말이다. 곰방대 빨던 상할머니가 늘상 입에 달고 살던 말처럼,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가 술술 나온다. 몸이 선생이다.


그런 날이 있다.

옆에 있던 친구가 보이고 길을 걷는데 해가 보이고 내 머리카락을 날리는 바람이 보이는 때 말이다. 그동안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한다고 보고도 못 본 척, 아무것도 안하면서 바쁜 척, 알고도 모른 척 그저 겉으로만 살아왔는지. 스티브 잡스가 남긴 말이 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게
인생의 고비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 날이 있다.

편지라도 한통 써서 보내고 싶고, 엄마 무릎에 누워 살살 귀를 파 달라고 안기고 싶고, 오랫동안 연락 못한 친구가 그리운 때 말이다. 한때는 가지 않던 시간이 나를 안달나게 했으나 지금은 너무 빠른 시간이 나를 안달나게 한다. 그 많던 시간은 과거가 되고 주어진 시간은 늘 짧고 다가올 시간은 두렵다.


그런 날이 있다.

그냥 무슨 글이라도 쓰고 싶은 날,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은 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은 날 말이다. 작가도, 교수도, 신부도 아니고 그저 한 인간으로서 낯선 시간을 마주해야 하는 때가 있다.


종종 그런 날이 있다.


그리고 그런 날, 총총 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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