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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연중 제22주일

40년만에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의 신발 사이즈가 270이 아니라 265라는 사실입니다. 이게 뭐 그리 대단한가 싶겠지만 40년 동안 270 사이즈의 신발을 신다가 우연히 265 사이즈 신발을 신어보니 발에 딱 맞는 신발이 참 편했습니다.  


‘왜 다른 사이즈의 신발을 신고 살았을까?’ 생각해보니 삼형제가 함께 크는 과정에서 부모님께서 한 사이즈의 신발을 나눠 신도록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발 사이즈는 원래 265가 맞지만 270신발을 신고 살면서 거기에 적응하여 익숙해졌습니다. 달리 말하면 저의 발 크기는 변함이 없지만 저의 인식과 이해가 변함으로써 제 의식의 발 크기가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개고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입학한 뒤 맞이한 부활대축일에 처음으로 개고기를 맛보았습니다. 신학교는 대축일, 주교님의 신학교 공식 방문 등이 있을 때면 개고기를 먹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신학교에서 개를 키웠고 대축일이 되면 그 개를 잡아 먹었습니다. 이런 신학교 전통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 신학생들을 양성하면서 성장기에 있는 신학생들에게 먹일 고기로 개가 가장 구하기 쉬웠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이 개를 먹는다고 욕을 하는 프랑스에서 온 선교사들이 개고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지금은 그 전통도 바뀌어 신학교에서도 개고기가 나올 때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다른 음식을 같이 마련한다고 합니다. 저도 개를 키워 보았기에 개고기를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이처럼 음식에 대한 사람의 이해도 바뀌고 먹는 것도 변하는 것처럼 사람의 전통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좀체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 사람이 스스로 품고 있는 생각들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바뀌지 않는 자신만의 습관과 단점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을 가서 만난 열 명의 신학교 동기들과 함께 살면서 발견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매일 수업을 같이 듣는 열명 가운데 제가 좋아하게 된 신학생이 두 서너명이 있었고 같이 있어도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열명 가운데 한명을 제가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생면부지의 한 미국 신학생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의 단점을 보고 자꾸 미워할 이유를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치 저의 약점을 감추어 줄 친구, 혹은 제 마음의 악함을 대신 단죄 받을 희생물을 찾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했던 것입니다. 아마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미워할 사람을 계속 한 둘은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듯 사람은 각자의 한계와 나약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잘 살펴야 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설마 내가 그럴리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천막에 누가 머물리이까? 흠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마음속 진실을 말하는 이, 함부로 혀를 놀리지 않는 이라네” (시편 15). 오늘 화답송의 말씀처럼, 이렇게 정의롭고 진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 되면 참 좋겠습니다만 대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부족함을 느끼며 그 때문에 참담할 때도 많습니다. 이럴 때 생각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은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남에 대한 뒷담화부터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족, 회사, 심지어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말로 인해 주고 받는 상처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할수록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말이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 말은 함부로 할 수 있지만 말씀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유력한 사람의 ‘한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 말이 아니라 말씀을 한다면 그 형식과 내용이 깊어질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구세주 예수님은 ‘말씀(Logos)’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오셨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야고 1,21). 


오늘 우리는 이 미사에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성체성사로 받아 모십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오시는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실행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일(야고 1,27)입니다. 


이 모든 일이 쉽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나약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천막에 머물 자격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는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야고 1,17)를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이 위대한 신(신명 4,7)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빛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갑니다. 어둠의 두려움이 아니라 빛의 기쁨으로 용기있게 나아갑니다. 이제 우리에게 오시는 말씀을 공손히 받아 모시고 그 말씀과 함께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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