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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느티나무

더불어 숲으로 가는 길

군위성당 마당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본당이 세워질 때부터 지금까지 신앙공동체와 함께 자라 온 나무입니다. 늦게 티가 나기에 느티나무라 불리는 것처럼 처음에는 이름없는 나무였겠지만 지금은 성당 마당에 큰 그늘을 드리워주는 든든한 나무입니다.


그런데 한때 도시계획에 따라 성당 옆으로 도로가 나게 되어 느티나무가 잘릴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전임 본당신부님들께서 강하게 반대해서 느티나무를 지킬 수 있었지만 제가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공사가 재개되어 성당을 제외한 양쪽 도로가 완공되었습니다. 계속 반대를 했다가는 성당이 지역사회에서 고립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를 연결시키면서도 느티나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면담과 회의 끝에 느티나무가 있는 구간의 도로폭을 줄여서 공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일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오랜 세월을 두고 함께 한 존재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도로 공사와 연계하여 성당에 왕벚나무 여덟 그루, 느티나무 두 그루,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갑자기 나무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어린 나무들이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매일 돌보면서 사목 역시 나무를 심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이 나무를 심는 일이며,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일이 나무가 되는 일임을 말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말씀(Word), 성화(Icon), 그리고 자연(Nature)을 통해서입니다. 영어 단어의 앞 세 글자를 따서 ‘WIN’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캘리포니아 국립공원에서 만난 레드우드라는 나무는 천년을 넘게 살아왔기에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장 뛰어난 장관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자연은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입니다”(‘찬미받으소서’ 85항).


이렇듯 느티나무는 제게 신자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 소명, 사제로 살아가는 숙명,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생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천년을 자란 레드우드 앞에서


내 마음에 또 하나의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입니다. 이들은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대구교구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 해 온 든든한 느티나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교구청에서 일했던 오년 반동안 느티나무 곁에서 함께 한 시간이 떠오릅니다. 그 시간은 제(人)가 나무(木) 옆에서 쉴(休) 수 있었던 때였습니다.


교구장 대주교님의 비서신부로 그림자처럼 지내다가 수녀원 영어미사를 봉헌하러 성모당 앞 길을 건널 때면 저는 마치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따듯한 햇볕으로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말씀을 묵상하고 강론을 쓰는 일은 보통은 아무 권한도 없는 목동을 한순간 많은 수녀님들의 목자로 변하게 만들었습니다. 언젠가 수녀님들이 축일 축가로 불러준 ‘목자의 노래’가, 그래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라나는 나무 동무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꺼이 ‘사라(Sara)’를 위해 마라톤에 참가하기 시작한 수녀님들은 제가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살아있는 사람’이자 ‘달리는 수도자’로서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수녀님들 역시 나무를 심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는 사목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살아야 하는 소명, 수도자로 살아가는 숙명, 그리고 자연 안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생명을 주는 느티나무와 같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춘천마라톤을 함께 달린 샬트르 성바오로회 수녀님들 2016년


말없는 나무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왜 존재하냐고?’ ‘너는 어떤 나무가 되고 싶냐?’고 말입니다.


저는 이왕이면 느티나무가 되고 싶습니다. 처음에는 별 볼 일 없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쌓이면 티가 나는 느티나무가 되어 넓은 그늘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함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위로와 미소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무는 혼자가 아닙니다. 흙과 물, 벌레와 곤충, 바람과 태양이 함께 동무합니다. 그렇지만 나무가 가장 멋있을 때는 다른 나무와 함께 있을 때입니다.


나무 한 그루로서는 혼자일 뿐이지만 더불어 있으면 숲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선 나무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완성되는 길은 더불어 숲을 이룰 때입니다. 신영복 선생은 말했습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신영복 <담론> 중에서)


코로나19를 우리에게 가져온 환경과 생태의 위기,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사람사이 관계의 단절로 숨 쉬기 어려운 세상에서 맑은 공기를 나눠주는 더불어 숲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무에게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존재를 우리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어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사랑과 생명의 더불어 숲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무가 되고 싶은 이유입니다.


이제 나무가 나무에게 말합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이 글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에서 발간하는 회지 편집장 수녀님의 기고 요청에 따라 '나무'라는 주제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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