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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버렸다

넷플릭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후기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대할만한 일도 멋진 일도 아닌 쓸쓸한 일이다. 흔히들 로맨틱하게 상상하는 어른 대접을 받기 어려운 세상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안타까운 범주에 속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게, 자신의 일부가 죽는 것을 뜻했다.


젊음이 추억과 함께 죽자 어른이 되어 버렸다.


피터팬으로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삶이란 비루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쓸쓸하고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까닭에) 찬란한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찬 비가 오자 몽땅 떨어져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은행나무 잎 같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라는 넷플릭스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이 펜팔로 만난 '자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던' 첫사랑을 이십년이 지나 우연히 페북에서 발견하고 더 우연히 '친구 요청'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기서 긴 영화 이야기를 다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멋진 영화이니 직접 보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영화를 보고서 내게 남은 것은 평범한 것을 싫어해서 떠난 첫사랑이 올린 지극히 평범한 페북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이 깨닫게 되는 그가 살았던 과거의 평범함이다.


우리는 누구나 찬란한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어른이 되는 순간) 그 모든 것 또한 지극히 평범한 것, 지나간 나만의 추억일 뿐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비루하고 특별할 것 없는 첫사랑이 보이는 것이다.


뭐라 더 이상 우길 수 없을 때, 코너에 몰려 더 이상 버틸 다리의 힘이 다하면 어른이 되어야 한다. 현실에 항복하는 것이다.


한때 나의 삶이라 믿었던 것이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삶이 되레 나에게 묻는 것에 대답해야 하고 요구하는 것을 해야 되는 때가 온다.


삶은 이제 몸빼만 입고 단장을 포기한 결혼 삼십년차 마누라처럼, 민낯 그대로의 무서운 얼굴로 하루하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텨야 하는 일만 남았음을 가르쳐준다. 


자신의 일부가 죽거나 누구로부터 완전히 잊혀져 존재의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 다다르게 되는 어른,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무작정 과거로 돌아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무리 뛰어봐도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 변할 것이 하나도 없다. 


미안해 용서를 구하고 싶어도, 사랑한다 말하고 싶어도,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그 어쩔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 어른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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