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바람이 불어오는 곳: 제주국제마라톤 1

사람은 어두운 곳(womb, 자궁)에서 와 어두운 곳(tomb, 무덤)으로 간다. 그 반짝이는 사이를 삶이라 부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2015년 80명의 '살아있는 사람 11'은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3년 연속 경주국제마라톤을 달린 후 새로운 마라톤 대회를 찾고 있었는데 함께 뛰었던 수녀님께서 이동해 가신 제주에서 '아름다운 제주국제마라톤 대회'가 열림을 알고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떠났다. 제주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 지도신부님과 연락이 닿아 살아있는 사람의 취지를 알렸더니 기쁜 마음으로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뛰겠다고 하셨다. 거기다가 제주교구 교구청에 계신 수녀님들도 함께 하게 되어 어느 때보다 전국적인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살아있는 사람 11 수녀님들, 2015년


하루 일찍 도착해 사려니 숲길을 걸었다. 말 그대로 신성한(사려니) 숲이 주는 기운을 받으며 자연 안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이어 일행은 성산 일출봉을 오른 뒤 그날 잠을 잘 성산포 성당으로 갔다. 성산포 성당 마당에 모여 후원금 봉헌과 감사미사를 드렸다.


“삶은 모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Life is either a daring adventure or nothing at all)."라는 헬렌 켈러의 말로 강론을 했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침내 사랑받고 싶은 갈망은 우리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중심의 삶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바꾸면 삶은 그 자체로 모험이 된다. 두렵지만 설레는 모험, 바로 살아있는 사람이 그날 해가 지는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동이었다.


성산포 성당에서, 2015년




10월 11일 모험의 날이 밝았다. 대회에서 가장 주목을 끌었던 것은 수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베일을 쓴 채로 마라톤에 참가한 17명의 수녀님들이었다. 수도회는 달랐지만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한마음으로 모두 운동화를 신고 참가번호를 가슴에 단 정식 마라토너들이었다. 수도복을 입고 뛴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 그 가운데 세 분은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해 오셨다.


드디어 제주 국제마라톤 대회가 시작되었다. 코발트빛 바다가 아름다운 김녕해수욕장에서 출발하여 월정리로 향해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코스였다. 산과 바다, 섬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코스는 아름다웠다. 상쾌한 바닷바람과 진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유명한 월정리 해안가를 지날 때는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풀코스 반환점을 돌아 뛰는데 진짜 쎈 바닷바람이 맞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낭만이 아닌 낭패였다. 풀코스를 뛰는 사람은 몇 안 되었기에 혼자서 바람과 사투를 벌이면서 뛰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앞서가던 사람을 따라잡았는데 어떤 사람이 ‘이번에 처음 뛰는지’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내 나이를 물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말해 주고 나니 그때부터 바로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난 제주 바닷바람, 진짜 쎈 바람을 맞아 죽어라고 뛰는데 이 사람은 10킬로미터 이상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뒤에 혹은 옆에 바짝 붙어서 뛰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1킬로미터 사인이 나타나자 총알같이 뛰어나갔다. 뒤를 돌아보거나 고맙다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나중에 제주 국제마라톤 홈페이지에서 40대 기록을 보니 1등이 바로 나와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그 매너 없는 사람이었다. (달리기를 아무리 잘 해도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하프 마라톤에 도전한 수녀님 세 분도 모두 바람을 가르며 멋지게 완주하셨다. 결승선을 향해 수도복을 날리며 상기된 얼굴로 달려오는 수녀님들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없는 감동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햇살이 눈부신 곳, 나뭇잎이 손짓하는 그곳에서 바람에 몸 맡기며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자연과 하나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