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보야' 1

사랑은 의지입니다. 김수환


2018년 1월 나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오년반만에 비서 신부로서의 소임을 마치고 군위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본당신부가 된 것이다! 2017년 10월에 있었던 군위 삼국유사 마라톤의 좋은 기억이 운명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2017년 12월에 완공된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가에 들어선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 원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신학교 일학년 때 뵈었던 추기경님의 따듯한 미소가 떠오르며 그분이 유년시절을 보낸 초가집이 내 집처럼 느껴졌다.


KakaoTalk_Photo_2020-07-30-10-49-57.jpeg 필자가 그린 아름다운 군위성당, 2018년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그리신 자화상 '바보야'에는 추기경님의 삶과 그분의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다. 47세에 세계 최연소,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어 평생 하느님 사랑을 말하고 실천하며 살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한 바보, 그래서 스스로 "제가 잘났으면 뭐 그리 잘났고 크면 얼마나 크며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내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하고 말씀하셨다. 85세 노구에 자신을 그리고는 '바보야'라고 부르며,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하고 수줍게 고백하셨다.


바보야, 김수환 자화상 @google.com


추기경님께서는 달리는 사람, 더 정확하게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사랑이 많으셨다. 2002년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 창립 미사에서 "달려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친필을 적어주셨고, 지금은 천오백 명이 넘는 전국 가톨릭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이 마라톤 대회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달리고 있다. 추기경님의 응원을 몸에 새기고 달리는 이들을 보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상 끝까지 뛰었던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환호가 느껴진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2018년 10월 13일, 189명의 '살아있는 사람 14'는 다시 군위 삼국유사 마라톤을 찾았다. "서로 밥이 되어주십시오."라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새긴 파란 손수건을 모두 목에 두르고 시월의 가을날을 신나게 달렸다. 마라톤 후에는 군위성당에 모여 바베큐와 수제맥주를 마셨고 다함께 감사와 후원금 봉헌 미사를 드렸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What you dream alone remains a dream, but what you dream with others becomes a reality.)" 본당 주일학교 어린이, 학부모, 신자들, 수녀님들, 전국에서 온 청년들이 모두 함께 꿈을 꾸니 한번도 보지 못한 현실을 만났다. 그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더 큰 현실, 곧 사랑의 공동체가 가져오는 신선한 즐거움과 보람이었다.


'열정'을 뜻하는 영어 패션(passion)이 고유명사로 더 패션(The Passion)이 되면 그것은 예수님이 겪으신 ‘수난’을 뜻한다.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아부을 때, 시간과 에너지를 과감히 투자할 때 때론 우리는 그것으로 인한 고통, 혹은 그것을 이루지 못한 아픔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실패가 두렵다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이런 열정에 ‘함께’라는 뜻의 컴(com)을 더하면 컴패션(com-passion), 곧 연민, 공감, 사랑이 현실이 된다. 남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곧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며 함께 달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이다.


개인적으로는 14년째로 접어드는 나의 마라톤에서 특별한 체험의 시간을 가졌다. 매번 마라톤을 준비할 때마다 나는 마라톤에 입문한 사람들이 어떻게 준비해 달리고 목표에 도달하는지 함께 뛰면서 가르쳐 준다. 그러나 막상 레이스가 시작되면 언제나 혼자였다. 하프마라톤 4번, 풀코스 마라톤 15번을 완주하면서 한번도 적당히 뛴 적이 없었다. 나에게 마라톤이란 한계에 도전하는 절정의 경험,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녹아드는 시간,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영웅이 되는 전장과 다름 없었다. 먹이를 뒤쫓는 사자처럼 나름의 목표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뛰는 것이 나만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번 마라톤에서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보폭에 맞춰 함께 뛰기로 했는데 그 상대는 본당 구역에 있는 '성 바오로 청소년의 집' 중학교 1학년 김은준(시몬)이었다. 사라와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강론 때 듣고서 달리기 연습을 시작해 하프 코스에 도전하겠다고 했을 때는 걱정을 했지만 매일 연습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함께 뛰기로 했다. 실제로 청소년의 집에 가서 소년들과 함께 연습도 했다.


중학생과 보폭을 맞춰 함께 하프 마라톤을 뛴다는 것, 내게는 생각지도 못한 도전이었다. 맘대로 뛰고 싶은 나의 욕망을 누르고 상대를 배려하며 뛰는 것은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누군가와 동행할 때 나의 방식, 기대, 목표를 내세우기보다 동반자에게 '밥이 되어주어야 한다.'라는 추기경님의 말씀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프코스 후반부에 들어 힘들어 포기하고 싶어 하는 소년을 계속 격려하며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함께 뛰는 법을 배웠다. 내 것을 내려놓으니 우리 것이 있었다. 우리는 2시간을 훌쩍 넘겨 함께 골인했고 서로에게 완주메달을 걸어주었다. 나도 그만큼 기뻤다.


1589609196104.jpg?type=w966 중학교 1학년 김은준(시몬)과 함께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2018년


2018년 '살아있는 사람 14'를 준비할 때에는 한가지 평소와는 다른 일을 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공식 로고를 만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Living Person)의 정신을 잘 드러내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발'과 인간에 대한 예수님 사랑을 가장 깊이 표현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십자가'를 결합해서 한 발자국 뛸 때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냄을 형상화했다.


살아있는 사람 로고, 2018년


머리로 혹은 입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아니라 몸으로, 더 정확하게는 발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라 믿는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간 바오로 사도처럼 어디에서나 당당하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약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42.195 킬로미터를 갈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인 한 걸음, 이 구체적인 한 발자국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한 걸음부터 시작되고 한 발자국이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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