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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뛰느냐고 묻는다면

<활기찬 몸과 영성> 매거진을 시작하며

"이젠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최근 들어 종종 듣는 말이다. 지난 8월 탈장 수술과 나이 오십에 들어섬을 아는 사람들이 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다.


사실 예전만큼 못 달리고 있다. 예전에는 1시간에 12킬로미터를 거뜬히 달렸는데 요즘은 10킬로미터를 뛰는데 1시간 가까이 걸린다. 아무래도 몸이 예전같지 않으니 주변 사람들의 말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달리는 거리나 시간을 더 줄일까 고민하다가 그 반대의 길로 가야할 몇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죠지 쉬한(Dr. George Sheehan)이 말한 것처럼, 나에게 죄란 자신이 가진 가능성에 다다르는데 실패하는 것이고, 죄책감이란 살아내지 못한 삶이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많은 달란트를 주셨는데 달릴 수 있는 몸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 몸을 제대로 쓰지 않고 땅에 묻어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제로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다. 단지 사제라는 이유로 면제되는 것들, 예를 들어 경제적 어려움, 자녀문제 등에서 나만 걱정없이 지내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더욱이 주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치열함을 보면 나는 턱없이 미치지 못해 부끄러울 때가 많다. 거기다가 사제란 이유로 나의 말과 행동에 어울리지 않게 받는 배려나 대우는 나를 몸둘 바 모르게 한다.


그 때문에 늘 깨어있는 종으로 몸을 단련하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은 사제로서 필수적인 일이다. 


바오로 사도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상의 경기자들에게 뒤지지 않고 자신이 먼저 복음을 살 수 있도록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나는 거짓말쟁이자 실격자가 되고 말 것이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4-27).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것처럼,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충만하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꾸준히 달리는 것이다. 덕분에 몸의 건강도 유지할 수 있으니 달리기란 내겐 선물이다.




오늘 하루 조용히 머문다. 누군가를 찾지 않고 무엇을 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간단한 일을 하고 책을 읽으며 혼자 방 안에 있다. 어제 야외에서 달렸고 오늘 비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밖으로 달리러 나갔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달리는 것 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사제로 하는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사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달리는 신부(Running Father)'로 사는 것 뿐이다.


그리고 달리다보면 현재에 머물기보다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격하게 뛰는 심장은 내가 누구인지, 흐르는 땀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달리는 몸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마치 거룩한 성인(Saint)처럼, 끊임없는 의혹에 휩싸이면서도 계속해서 도전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래서 달리기를 통해 감히 '달리는 성인(Running Saint)'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꿈까지 꾼다. 


구경꾼이 주인공이 되고, 죽을 사람이 살고, 죄인이 성인이 되게끔 하는 달리기는, 그래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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