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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상의 미소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나이 7살 때 정하상 바오로는 충격적인 일을 겪습니다.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형 정철상 가롤로가 그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때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가족 전부가 천주쟁이라는 이유로 잡혔는데 정하상과 동생 정정혜가 너무 어리니 관가에서는 어머니 유소사 세실리아와 함께 풀어주었지만 아버지와 형은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산은 몰수당하고 가문에서도 쫓겨나 정하상은 고통과 시련의 어린시절을 보냅니다. 무엇보다 아무도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마치 나병환자처럼 대했으니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왜 천주교를 믿어 이런 고난을 겪는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은 인내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습니다. 극동의 작은 나라 조선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음을 교황청에 편지로 알려 1831년 조선교구가 설립되도록 했으며, 목자가 없는 이땅에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 걸어서 9번이나 북경을 드나들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는 정하상을 엥베르 주교는 사제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여겨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고 정하상은 한국 최초의 사제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정하상은 엥베르 주교와 사제들을 피신시키고 체포되었고 미리 쓴 '상재상서'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전한 뒤 9월 22일 서소문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사제가 되지는 못했지만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 그는 형장의 칼날을 받기 전 파아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지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살아낸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첫번째 관문에서 넘어집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욕심, 이기심, 생존에의 의지만이 가득한 자신에게 이끌려 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은 반드시 버려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눈에 띄고 싶고 지배하고 싶고 더 많이 원하는 자신은 두려움을 무기로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자신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늘 우리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은 그저 '내가 너보다 낫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에고(Ego)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공급하는 부정적인 먹이입니다. 


우리는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다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큼 했으니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자신은 버려야 합니다. 


대신 모든 근심의 싹을 없애 줄 지혜의 말을 스스로에게 되내어야 합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I may be wrong)."


십자가는 십자가입니다. 인생이 고통이기에 누구도 십자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왕 져야 하는 십자가라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가슴에 안고 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의 십자가만 보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나의 고통만이 아니라 나를 위해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따라 걸어갑시다.


그제서야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하상 바오로가 평생을 실천한 그것을 말입니다.


"대저 목숨을 걸고 생명을 바쳐서 천주의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나타냄은 저희들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상재상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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