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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치다

한 사무라이 이야기

여기 방랑자 신세가 되어 떠도는 한 사무라이가 있다. 


마침 큰 비가 내려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마을의 누추한 여관에 아내와 머무르게 된다. 그곳에는 같은 이유로 강을 건너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났다. 


어느날 여관에서 남자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던 창녀가 소리를 지른다. '누가 내 밥을 훔쳐갔냐? 잠시 한눈 판 사이 내 밥이 없어졌다고!' 


창녀는 쏟아지는 빗속에 여관에 갇힌 사람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이 어른할 것 없이 추궁하기 시작한다. 참다못한 사무라이가 나서려하자 부인이 말리며 말한다. 


"우리는 저 여인에게 더 친절해야 해요. 버려지고 외롭고 누구보다 관심이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사무라이는 창녀에게 자신이 대신 값을 치르겠다고 말하고는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간다. 


그날 저녁, 사무라이는 많은 음식을 진 일꾼들과 함께 돌아온다. 여관의 모든 사람을 불러 음식을 차리고 먹고 마시자고 말한다. 


술로 흥이 오르자 악단이 노래를 부르고 춤꾼은 춤을 춘다. 마침 창녀가 돌아오자 사무라이는 그녀와 사람들이 화해하고 같이 음식을 나누도록 한다. 흥겹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늦은 저녁 사무라이는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한다. 부인과의 약속을 어기고 돈을 걸고 내기 검술 시합을 했었다고. 처음에는 검을 팔아 음식을 사려했지만 전당포가 문을 닫아 다른 여지가 없었다고. 


아내는 남편이 용서의 바램으로 내미는 음식상을 받으며 웃는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젊은 사무라이들의 불필요한 결투를 말리던 그는 지역의 영주를 만난다. 영주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성으로 초대한다.


사무라이와 긴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인품에 감탄한 그는 그 자리에서 그를 사무라이들의 검술 선생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참모들은 그렇게 중요한 자리는 실력 검증없이 아무나 오를 수 없다며 반대한다. 어쩔 수 없이 사무라이의 실력을 점검할 대결 일정이 잡힌다.


사무라이는 가볍게 성의 가장 뛰어난 무사들을 이겼고 이를 보다 못해 화가 난 영주와 대결하게 된다. 사무라이는 영주의 바램대로 열심히 대결에 임했으나 그 때문에 영주는 검술에 밀려 연못에 빠지게 되고 미안해 하는 사무라이에게 모욕감을 느껴 그를 성에서 쫒아낸다.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을 검도장 사부들은 내기에서 이긴 사무라이에게 복수하려고 습격하지만 그의 실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영주에게 사무라이가 내기 시합을 해 돈을 벌었다고 고발한다.


비가 그치고 강을 건널 수 있는 때가 오지만 사무라이는 못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내를 위해 안정된 직장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때 영주로부터 전갈이 당도한다. 그의 실력이 아무리 출중해도 내기 시합에 참여한 사무라이는 사무라이들의 선생이 될 수 없다고. 이때 사무라이의 아내가 나서 전령의 우두머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남편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말입니다"(The important thing is not what he does but why he does. Can't people like you understand that?).


그녀는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남을 위해,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기 시합을 했다는 것을 변론하며 남편에게 앞으로는 언제든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한다.


다시 길을 떠난 사무라이와 아내. 강을 건너 길을 가는동안 사무라이 부인의 말이 영주에게 전해지고 영주는 진정한 사무라이를 잃었다는 사실에 자신이 직접 말을 몰고 그를 찾으러 나선다.


하지만 다른 길로 들어선 사무라이와 부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우연이 보게 된 <비 그치다(When the rain lifts)>는 다카시 고이즈마 감독의 1999년 작품이다. 


한 위대한 사무라이가 아내를 위해 성공을 바라면서도 남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남을 밀어내지 않는 선량함과 상냥함 때문에 길을 떠돌게 된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사무라이가 정착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주도 그러했듯이 그의 출중함과 상냥함이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무라이의 아내는 그런 남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경한다.


나는 '비 그치다'를 보면서 사무라이 부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했는가, 이것은 바로 내 삶에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목표 때문에 과정을 잃고 성공 때문에 마음을 잃는 때가 많다. 사무라이는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는게 고달팠지만 홀로 산속에서 검술을 수련하며 날뛰는 마음의 번잡함과 걱정을 베어낼 수 있었다.


나에게는 달리는 일이 수련이다. 본질에서 벗어나 복잡한 마음이 들 때는 달린다.


사무라이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가 기꺼이 자신의 칼을 팔아 가난하고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마음이다. 자신을 넘어서 자신의 소중한 것마저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내어줄 수 있는 그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검술을 통해 인품을 연마한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그는 행복한 사무라이다.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으니. 덕분에 사무라이는 오늘도 후회와 미련을 잘라내고 다시 용기를 낸다. 여전히 편치 않은 길이지만 살아있음을 느끼며 걷는다. 


비는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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