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지 않은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우연히 듣게 된 송창식의 '푸르른 날'이 어색한 날이다.
며칠째 내리는 비는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반갑지 않다.
노래의 클라이막스에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같은 구절을 두번이나 절절이 부르는데 갑자기 슬펐다가 곧 화가 났다.
분명 가사는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인데 내 귀에는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그럴 때가 있다. '니가 조금 양보하면', '네가 이것을 알아듣는다면', '니가 이렇게 한다면' 결국은 네가 죽는다면 내가 살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슬프고 화가 나는 이유는 매일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을 접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가족 중에 의사가 있다면 마주 앉아서 의대증원이 무슨 문제인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물어보고 답을 듣고 싶다.
의사들의 주장과 입장을 모르는바 아니다. 나름 일리도 있지만 그들이 외면하는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는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사명으로 생각하는 그 일에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지금 달려있다는 사실이다.(누군가 이렇게 비정해질때까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더 나은 의료체계, 의대교육의 질, 지역과 의료분야의 불균형 등 수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이기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내 동료 의사, 내 동료 학우가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자부심을 가진 일에 대한 나의 비전과 양심이란게 있다면 이렇게 모두가 죽기살기로 한 방향으로 달려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것은 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인가?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은 실로 어렵다. 인간 본성에 반한다.
하지만 내가 산다면, 너도 살 수 있게 해야 하는게 인간의 도리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