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페스트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읽고

프랑스의 어느 항구 도시에 사는 의사 리유는 집 밖에서 죽은 쥐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며칠 지나자 죽은 쥐는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사람들이 열이 나고 몸에 멍울이 생기고 고통을 호소합니다. 고통은 심해져 정신을 잃은 사람, 치료 도중에 죽은 사람, 천천히 사람들이 죽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고 닥쳐 올 재앙에 대해 실감하지 못합니다. 보통 재앙이란 너무 크면 실감이 나지 않으며 알 수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래가지 않겠지.’하며 재앙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재앙을 비현실적인, 그저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다 갑자기 도시가 봉쇄됩니다. 이제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버렸습니다. 갑작스런 귀양살이, 불안과 후회를 느끼며 감옥과 다름없는 생활이 시작됩니다. 과거와 원수가 되고 미래마저 박탈된 사람들에게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오직 더위와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끝없는 물결이 넘쳐 흐릅니다.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페스트>의 도입 부분입니다. <이방인>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페스트로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저는 페스트를 읽으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친 지금의 상황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알베르 카뮈(1913-1960) @google.com


페스트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의사 리유는 페스트 가운데에서도 묵묵히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진단하고 격리하고 수용하는 일을 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믿고 최선을 다합니다.  


봉쇄된 도시를 탈출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취재차 왔다가 고립된 신문기자 랑베르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의 사람도 아니고 전염병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무엇보다 사랑하는 여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합니다. 하지만 여러번 계획이 실패하는동안 차츰 재앙은 모든 사람에게 관계된 것이며, 혼자만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의사 리유를 돕기 시작합니다.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강론하는 신부도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불행은 마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기에 반성할 때가 온 것입니다. 반성을 통해 하느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신부는 죄없는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아이에게 내린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조용히 말합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조리에는 중간지점이 없으므로 모든 것을 믿든지 아니면 모든 것을 부정하든지라는 선택뿐인데 모든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고뇌 속에 죽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그 스스로가 부조리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아 고뇌하는 영혼입니다. 그에게 부조리란 ‘있을 수 없는 일’ 혹은 ‘모순’입니다. 


주인공 의사 리유는 온갖 어려움에도 함께 하던 든든한 친구가 페스트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 갑자기 방심한 자신의 친구를 덮쳐 죽이는 것을 지켜봐야 합니다. 엄청난 슬픔 속에서 그는 무릎 꿇고 ‘모든 것을 포기해선 안된다.’ ‘어둠 속에 더듬거리면서라도 전진을 계속하며 선을 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고 다짐합니다. 


사람이란 기다림에 지치면 아예 기다리지 않는 법, 도시 전체가 미래의 희망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쥐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페스트가 사라지고 도시가 다시 개방되고 성대한 축하행사가 열립니다. 행복한 얼굴로, 페스트에 승리한 듯한 얼굴로 그간의 비참함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집니다. 하지만 허망하게 구덩이에 묻혔거나 화장터에서 타 없어진 사람들과 더불어 삶의 기쁨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 어머니, 배우자, 가족들에게 페스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google.com




카뮈는 말합니다. ‘사람은 제각기 자기 속에 페스트, 즉 부조리를 지니고 있다. 모두가 피해자이며 죽음 이외에 해방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근거없는 희망을 가지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길이 있다면 바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 길은 인간에 대한 공감이며 유일한 관심사는 거룩한 사람, 곧 성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사실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 목숨조차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생각.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나온 것도, 세상을 떠나는 것도 우리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올 때가 돼서 왔다가 갈 때가 돼서 가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카뮈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늘 똑같은 것, 기쁨에 기뻐하고 슬픔에 슬퍼하는 존재이며 그것이 바로 인간의 힘이고 순진함입니다. 적어도 가끔은 기쁨이란게 찾아와서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느끼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희생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한 기억을 남기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난 속에서 배운 교훈, 즉 인간에게는 찬양해야 할 것이 경멸해야 할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으며 코로나 시대와 닮은 점이 많아 놀랐습니다. 특히 병든 사람이 격리된 채 있다가 죽으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되는 것은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절망의 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페스트가 사라진 것을 축하할 때 마지막으로 작가는 페스트는 없어지지 않았으며, 어딘가에 잠시 잠복해 있다고 말합니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 @google.com


오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8)하고 말씀하십니다. 수많은 참새보다 귀한 우리지만 죽음은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길을 만납니다. 알베르 카뮈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삶에 대한 의지로 부조리와 정면대결하면서 부조리한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삶의 의미란 부조리에 맞서 ‘반항’하면서 스스로 발견한 ‘자유’ 안에서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보다 앞서 걸은 길, 십자가의 길과 다름이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