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프는 한 번, 그러니까 제대로
링크드인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오랜만에 인터뷰나 해볼까 싶었다.
이직을 고려하는 기준이 있다. 외국계, 글로벌, 미국증시 상장사. 이 세 가지를 다 충족했다. 기업 현금흐름은 훨씬 낫고, 소프트웨어 회사지만 AI 시대에 꼭 필요한 영역이다. 거기에 빅테크가 굳이 자본을 투입해 직접 뛰어들 것 같지는 않은 영역. 관심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채용담당자가 이력서를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업데이트한 게 생성형 AI 대중화 이전이라, 이참에 Claude와 각 잡고 전면 개편했다. 부족했던 정량적 수치를 채워줬고, 내가 소심하게 쓴 표현들을 생각지도 못한 문장으로 바꿔줬다. 포맷까지 원하는 대로 손보니 개인적으로 아주 만족스러운 이력서가 나왔다.
예고 없는 폰스크리닝
이력서를 보낸 다음 날 저녁,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받았더니 채용담당자였다. 지금 바로 폰스크리닝을 하자는 것이었다. 스케줄 잡는 메시지를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전화했다고 했다. 메일을 확인해 보니 불과 5분 전에 보낸 메시지였다.
내일 하면 안 되냐고 했지만 10분이면 된다며 지금 하자고 한다. 영어도 약한데 인도 영어는 더 알아듣기 힘들다. 전화 대신 Zoom으로 하자고 했고, 그렇게 갑작스러운 스크리닝이 시작됐다.
다짜고짜 질문하라고 해서 나는 조금 화난 어조로 말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인터뷰를 하면 어떻게 합니까. 업무 끝나고 유튜브 보면서 쉬고 있었는데, 마침 집에 있어서 컴퓨터라도 쓰지, 밖에 있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한국 지사에 내 포지션이 있냐는 질문부터 제대로 된 답을 못한다. 계속 질문을 퍼부었다. 대부분 예상한 대답이었다. 왜 이렇게 급했는지, 지금 그 사무실 분위기가 어떨지 한 번에 그려졌다.
역시 내가 늘 되새기는 취업의 법칙.
"나를 뽑는 회사는 나보다 수준이 낮다."
얻는 것과 잃는 것
다음 날 하루 종일 계산해봤다. 이직 시 통상적인 최대 연봉 인상폭, RSU(회사 주식 보상) 규모의 차이, 업무 환경까지. 정량적으로도, 정성적으로도 따져봤다.
결론은 간단했다. 어쩌면 전 세계 직장인 상위 0.1%일 지금의 업무 환경을 포기할 만큼 메리트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이력서 멋지게 업데이트한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예전에는 스타트업을 떠돌며 회사를 바꾸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지금은 이직 자체를 큰 비용으로 인식하게 됐다. 그러고 보니 투자도 비슷하다. 어느 레벨이 되기 전엔 사고팔기를 반복하지만, 나중에 복기해보면 대부분 진득하게 오래 들고 있는 게 가장 좋은 수익률을 가져다준다.
아파트 갈아타기와 비교해봐도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남이 인정하는 것을 골라야 한다
내가 보기에 저평가인 것 같아서 고른 동네와 아파트는, 살아보면 왜 옆동네가 더 비싼지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싼 돈을 지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직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 경험 삼아 Palantir Deployment Strategist에 지원한 적이 있다. 폰스크리닝 때 리크루터가 이런 말을 했다. "지원하신 포지션보다 개발자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바꿔볼 생각 없으세요?" 내 딴엔 개발·엔지니어 경력에 PM 역할과 고객 커뮤니케이션까지 두루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고, 그 포지션은 더 깊은 데이터 사이언스 인사이트가 필요했다. 당연히 1차 면접 탈락(Palantir는 탈락 메일조차 보내주지 않는다). 남이 인정하는 경력으로 지원해야 좋은 회사, 높은 보상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내가 좋아하는 건 사이드잡으로도 할 수 있으니까.
가능하면 한 번에 최대한 점프하자
아파트 갈아타기는 하락장에 하는 게 정석이다. 자금이 충분하다면 언제든 상관없지만, 일반적인 경우라면 하락장이 기회다. 문제는 하락장의 타이밍이다. 2022년 말~2023년 초처럼 외부 충격에 의한 급락은 기간이 짧고 V자 반등을 한다. 반대로 긴 하락장은 심리가 죽어 매수 의지 자체가 꺾인다. 결국 인생에서 갈아타기 기회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최대한, 가능하면 2단계 점프를 해야 한다.
이직도 다르지 않다. 예전엔 회사를 옮겨다니며 연봉을 높이고 경험을 쌓는 게 가능했다. 앞으로 초양극화 시대에는 회사도 양극화될 것이고, 잦은 이직의 비용 대비 효과는 점점 낮아질 것이다. 그래서 실력을 키우는 것 외에, 외부 변화를 빠르게 읽고 이용하는 감각이 중요하다.
나의 경우, 코로나 시절 제로금리로 전 세계 기업들이 채용을 쏟아붓던 시기를 빠르게 포착했다. 능력이 충분치 않아도 외국계 회사에 도전한 것이 그 예다. 최소한 연봉을 올리거나, 인생에 도움 될 동료를 만나거나, 업무 환경을 개선할 기회는 분명히 있다.
이제 나는 다시 평온한 저녁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