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봄이다

봄을 기다리는 여행자

by 초코파이


울퉁불퉁한 아스팔트가 햇볕에 달궈지기 전, 우붓의 아침 공기는 아직 차분했다.

11살 아들과 함께 오픈런으로 들어선 카페.
문을 열자마자 밀려드는 시원한 공기를 상상하지만, 이곳에서는 냉랭한 카페 온도를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테이블 위에 음료를 내려놓으며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어 인증샷을 찍는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한 일상의 동작.


< Sonya와 Eun Seok >




“영어 이름 말이야, 쏘-냐로 하는 게 어때?”


대학교 졸업 후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Y과장님이 건넨 제안이었다.
나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네, 쏘냐로 할게요.”라고 답했다.

마치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듯, 단숨에.

즉흥적으로 다가온 이름은 20년 동안 내 곁을 지켰다. 회사에서, 회의실에서, 명함 위에서.


추석 명절의 달콤한 휴일을 앞두고 쌓여있는 업무를 정리하느라 모두가 분주하던 날,

17년 동안 매일같이 드나들던 공간을 나왔다.

후에 생각해 보니 살아온 날들 중에 가장 길게 머물렀던 곳이었다.


퇴사한 지 석 달.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이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사무실 안에서 창밖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전화도, 이메일도, 고민도 내려놓고 멍하니 유유자적하는 날들을 꿈꾸던 그때.

사람들이 남긴 정보로 가득한 ‘한 달 살기’는 늘 가보고 싶었던 여행이었지만, 현실의 장벽 앞에서 쉽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토록 망설이던 여행 속에 와 있구나.

그동안의 여행은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이 나를 빈껍데기로 만드는 것 같은 서늘함은 무엇일까.

창밖을 바라보던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그 창밖에 서 있는 사람.







사람과 차, 오토바이로 붐비는 우붓 도심에서 구글 맵을 따라 십여분 걷다 보니, 번잡스러운 길 끝에서 갑자기 펼쳐진 풍경은 마치 서울 남대문 시장 한복판에서 경기도 이천 논밭으로 순간 이동한 듯했다.



“It’s not over till it’s over.”
짬부한 릿지워크 트래킹 길, 전신주에 펄럭이던 깃발의 문구.

멀리서부터 이끌렸었던 건지 사진을 찍고, 찍고, 또 찍는 나에게 건네는 메시지 같았다.
초록빛 동산에서 팔랑거리며 날아온 나비처럼,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반짝이는 그린라이트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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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온 발리에서의 한 달이라는 시간은 굵직한 이동 장소만 정한 채 시작하였다.
쫓기듯 도장 찍는 여행이 아니라, 느리게 걸으며 조급함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오로지 쉼, 그리고 아들과의 끈끈한 추억 만들기.



나는 봄을 좋아한다.

겨우내 빳빳하게 말라있던 가지에서 초록빛 새순이 돋고, 싱그러움이 무성해질 준비를 하는 봄. 그런 봄이 다시 나에게 찾아올 수 있을까.


아들이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프로필 문구는 ‘너는 나의 봄이다’였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계절은 폭염의 나날들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아들과의 봄이었던 순간들을 다시 회상하며 나만의 봄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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