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 무엇을 경험하게 해야 할까.
여행은 나에게 언제나 ‘아이에게 건네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선물은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 그래서 나는 늘 과하지 않게, 실패하지 않게, 아이에게 유익할 만한 것들을 고르려고 애썼다. 길을 고르고, 동선을 짜고, 혹시 모를 상황까지 미리 상상해 두는 일은 어쩐지 엄마로서의 성실함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물두 살에 처음 미국에 갔다. 그랜드캐니언의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순간과, 요세미티의 바위들이 하늘을 밀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풍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연은 그렇게 사람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언젠가 아이가 생기면, 그 풍경을 조금 더 이른 나이에 보여주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계획이 되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꼭 한국과는 다른 크기의 자연을 보여주고 싶다고 마음속에 적어두었다.
그 계획을 나는 꽤 오랫동안 떠들고 다녔다. 동네에서 만난 엄마들에게, 아이 친구 엄마들에게, 커피를 마시다 말고 “미국에 꼭 한번 데려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말이 많아지면 계획은 쉽게 사람들을 모은다. 여행 얘기는 늘 사람을 들뜨게 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몇 명이 모였고, 단체 채팅방이 만들어졌고, 여행 날짜와 도시 이름이 오르내렸다. 나는 그 안에서 오래된 이웃이었고, 아이의 친구 엄마였고, 같은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었다. 그 이름들은 서로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여행을 앞두고, 그 편안함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기대하는 여행의 모양이 서로 달랐고, 중요하게 여기는 지점도 달랐다. 누구에게 여행은 휴식이었고, 누구에게는 쇼핑이었고, 누구에게는 아이를 위한 체험 학습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자꾸 계산하게 되었다. 이 일정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지 않을지, 이 선택이 괜히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을지.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피곤해져 있었다.
결국 그 여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함께 떠나는 여행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그들과의 여행을 포기했고, 그 선택은 자연스럽게 관계의 거리로 이어졌다. 오래 이어온 관계를 정리한다는 표현은 언제나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아주 조용한 일이다. 인사를 덜 하게 되고, 안부를 묻지 않게 되고, 함께할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된다. 그 과정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었다.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닐까, 조금 더 맞춰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때마다 떠올랐던 것은, 여행길에서까지 누군가의 기대를 계산하며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나는 그들과 떠나기보다, 아이와 남고 싶었다.
이 문장은 내가 그때 붙인 가장 단순한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아이와 나는 둘만의 여행길에 올랐다. 공항의 자동문이 열리고, 짐이 컨베이어 벨트 위를 느리게 돌 때, 아이는 그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마음은 조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오래 품어온 계획이 실제의 시간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늘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설렘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내가 이 여행을 왜 시작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자 풍경의 밀도가 달라졌다. 건물 대신 바위가 보이고, 신호등 대신 길게 이어진 도로가 나타났다. 아이는 창밖을 보며 별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 풍경 앞에서 왜 이렇게 오래 서 있고 싶은 걸까.
여행을 준비하며 나는 줄곧 아이의 경험을 생각했다. 아이에게 어떤 장면을 건네줄 수 있을지, 이 시간이 아이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을지. 그런데 막상 그 풍경 앞에 서자, 내가 가장 오래 바라본 것은 아이의 표정보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이었다. 오래전에 보았던 장면이 겹쳐지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나란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선택과 포기, 역할과 책임이 쌓여 있었다.
익숙함은 늘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방식, 익숙한 관계. 그것들은 삶을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구조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가끔은, 그 익숙함이 나를 가두는 틀이 되기도 했다. 바꾸지 않아도 되는 이유, 벗어나지 않아도 되는 명분. 나는 그 안에서 꽤 오래 머물렀다.
그날, 광활한 풍경 앞에서 나는 익숙함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관계를 놓고, 어떤 방식에서 한 발 물러서는 일. 그것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이기보다, 오래 붙잡고 있던 나의 태도를 잠시 내려놓는 일에 더 가까웠다. 여행이 나를 바꿨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행은 대개 그렇게 극적인 일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만 그날만큼은, 익숙한 선택 대신 조금 덜 익숙한 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떠남의 이유는 늘 아이였다.
그러나 도착한 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것은, 그 풍경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여전히 종종 익숙한 것을 고른다. 익숙한 사람이 편하고, 익숙한 방식이 안전하다. 다만, 그것이 나를 지켜주는지, 아니면 나를 가두고 있는지,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그 질문 하나를 품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 여행은 내게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