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심주의
전철역 플랫폼에서 웬 매미소리가 난다. 고개를 들고 보니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 두 녀석이 매미 한 마리씩을 손으로 쥐고 있다. 장난감인가?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진짜 살아있는 매미였다.
"너희 그거, 밖에 버리고 와. 갖고 타면 안 돼."
"네!"
역무원이 나타나서 주의를 준다. 그래도 엄연히 살아 있는 곤충인데, 밖에 버리고 오라니... 표현 참 별로라고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게 매미를 사물로 만들었다. 그것도 취급 금지 품목으로. 의외로 아이들이 쿨하게 따라 주었다. 바로 "네!"라고 대답하는 게 신기했다.
<띠리리링. 지금 00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서 주시길 바랍니다.>
"아저씨, 이거 그냥 죽이면 안 돼요? 저희 이 전철 타야 돼요."
"따라와. 여기선 안 돼. 밖에 나가자."
아이들은 한 술 더 떴다. 차라리 사물화가 낫다 싶을 정도로. 전철을 타야 하는데 매미 때문에 놓치게 생겼으니 죽여야겠단다. 너무나도 일상적인 목소리와 어조가 나를 더 심란하게 했다.
세상에 윤리가 존재하는가?
세상에 사랑이 있는가?
나는 지금 매미 따위에 오버하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인간중심주의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곤충이 하찮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린이의 심심풀이 오징어땅콩이 되고자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생명도 재미로 잡고 귀찮다고 죽여선 안 될 일이다.
김동식 소설이 갑자기 생각났다. 작품 제목이 기억이 나진 않는다. 거대한 요괴가 여러 명의 사람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 잡은 사람의 목을 한 명씩 꺾으며 중얼거리는 것이었다(소설에는 '마치 콩나물 대가리를 따듯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나중에 연구에 의해 요괴의 말을 번역했더니 놀랍게도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ㅡ."였다. 우리가 꽃 한 무더기를 꺾어 놓고 하던 짓이었다. 우리가 인간이 아닌 것을 하찮게 여기듯 요괴도 요괴가 아닌 것들에 그러했던 것이다. 깊은 울림을 주던 책이었다. 뭔가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가끔 무엇이 상식이고 선인지 헷갈린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매미를 죽이면 안 되냐고 질문하는 아이들은 악한가? 전혀 악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의 사고는 순전히 어른들의 책임이다.
아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열대어를 비롯한 물고기나 달팽이 등을 받아오기도 했었고 생명과학 방과 후에서 사슴벌레도 받아 왔었다. 화분도 몇 번 받아 왔었다. 내 불찰이다. 나는 식물이든 생물이든 잘 키우지 못했고 언제부턴가 아들은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잘 돌보지 못한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게 섬뜩했다. 나는 아들에게 앞으론 어떤 생물이든 받아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렇게 돌보지 못해서 죽게 두면 안 되는 거라고.
아들은 엄마의 말을 잘 들어줬다. 어떤 날은 자기만 물고기를 받지 않았다고 펑펑 울면서 오기도 했다. 예쁘고 짠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가르쳐야 한다. 그 생명이 비단 사람뿐이어서는 안 된다. 생명 자체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이 땅에서 윤리가, 사랑이 지켜질 것이다.
한여름 한 때 실컷 울고 생을 마감하는 매미의 생명을 우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지켜봐 줘야 할 것이다. 그들을 함부로 잡는 아이들의 마음도 소중히 바라보고 그 마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줘야 할 것이다. 아이들일 때 가능한 일이다. 매미를 잡고 함께 전철을 타려고 하는 것도, 죽이려는 것도, 그 마음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그렇기에 어른의 역할이 많고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