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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를 앞둔 2월 어느 날의 일기

의식의 흐름

by 문영

잠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아프고 힘이 쑤욱 빠졌다.


짧고 굵게 아팠다. 이게 정말 큰 병이 아니라고? 너무 다행이지만 믿을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증상은 당장 응급실을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제 새벽부터 열이 나고 혈뇨가 계속 됐다. 좀 과장해서 십 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서 울며 혈뇨를 봤다. 통증이 어마어마했다.


아이들과의 약속은 절대 미루지 않는다. 그런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필 엊그제 회의 후 굳이 한 잔 하겠다고 차도 학교에 둔 채 퇴근했었다. 모레 나올 거니까.라는 짧은 생각에.


인생은 자주 예측대로 흐르지 않는다. 새벽에 눈을 떴고 화장실을 갔고 통증이 시작 됐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뭐지 뭐지. 물을 마시고 노트북을 켜고 화장실을 갔고 으악 고요히 비명을 지르고 평가서를 마무리하고 화장실을 가고 어.. 왜 계속 화장실에 가고 싶은가... 생각하며 또 통증에 눈물 찔끔.


일시적인 줄 알았다. 그러나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더디게 출근 준비를 했다. 그러다 결국 출근을 포기했다.


계속되는 요의와 점점 심해지는 통증, 결정적으로 많아지는 피의 양에 겁이 덜컥 났다. 도저히 학교부터 갈 상황이 아니었다. 몇 번씩 갈아탈 자신도 없었다. 하필 차가... 없다. 택시비는 너무 아깝다. 다 떠나서 겁이 났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 거 같았다.


모든 일정을 조정하고 출근을 포기했다. 우선 누웠다. 집 앞 병원이 열 시에 문을 연다. 열 시가 참 더디게 왔다.




방광염이란다. 소변검사 컵에 담긴 소변이 흡사 적포도주 같았다.


원래 이렇게 혈뇨를 보나요.

네, 방광염이 심하면 이틀까진 그럴 수 있어요.

이유가 뭐예요.

면역력 문제죠.


매우 아픈, 다량의 약이 투입되는 느낌의 엉덩이 주사를 맞고 일주일 치 항생제와 이틀 치 진통제를 처방받아 한아름 들고 왔다.


그러고도 혈뇨와 통증은 계속 됐다. 네 시간 간격으로 진통제를 먹었다. 큰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 점심을 챙겨주며 같이 먹고 또 약을 한아름 털어 넣고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학교 일을 했다. 꼭 지금 써야 하는 공문만 휘리릭 쓰고 올린 후 까무룩 잠이 들었다.


두 시간, 잘 잤다. 잠이 보약이구나. 좀 나아진 느낌이다. 그러나 다시 시작된 혈뇨와 통증. 난감하다. 내가 이 병을 걸려 본 적이 없나. 낯선 통증이 당황스럽다.


어찌어찌 몽롱한 정신으로 통증과 씨름하다 열 시부터 잤다. 새벽에 요의도 느끼지 않고 쭉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갑자기 몸이 너무 괜찮아졌다. 진짜 잠이 보약이었다.


문제는 기력이 쇠했다. 혈뇨와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는데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다.


마치 아이를 낳고 난 후처럼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간 느낌이다.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며칠 전에 예약해 뒀던 통증의학과에 갔다. 엄지손가락 힘줄 염좌. 득궈벵이라는 병이라던데 이번엔 오른쪽 발등이 아팠다. 혹시 당뇨 합병증? 당뇨도 아닌데 주워들은 잡지식에 또 겁이 났다.


발등도 힘줄 염좌란다.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가 의사 선생님이 주사를 놔주러 오셔서 깼다.


선생님, 제가 어제 급성 방광염에 걸려서 너무 아팠어요.

아이고, 그거 고생인데...

저 지난번 맞은 면역력 강화 수액도 놔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놔 드리죠.


그렇게 한 시간을 또 푹 잤다.

플라시보일 수도 있다. 한층 개운함을 느끼며 집에 왔다. 그런데 계속 졸리다.




오늘도 일찍 잘 생각이었다. 밤 아홉 시, 동료 선생님께 톡이 왔다. 공문 내용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니, 보내기 전에 질문을 했어야지. 짜증이 버럭 났지만 공손히 답하고 결국 통화로 이어졌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논의였다. 갑자기 정신이 각성됐다. 방광염도 스트레스 때문일 수 있겠다고 생각됐다.




어렸을 적 한의원에서 내 몸이 무척 예민하다 했었다. 나는 성격이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했는데 의사는 몸 자체가 상당히 예민하여 스트레스에 민감하다 했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말이 신기했었다.


어쩌면 약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잔병치레가 많고 잔병의 강도가 세다. 호되게 아프다.




그렇게 잠이 쏟아지더니 정신이 말짱해졌다. 손과 발등 주사 맞은 곳에 동그란 밴드가 붙어 있다. 여전히 기력이 없다. 앞으로 만날 일들이 갑자기 버겁게 느껴졌다.


사직서. 직장인은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다는 그것.

내가 낼 수 있을까. 이제 진짜 버거운데. 하는 순간

메일이 오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메일이 하나씩 들어온다. 나도 잊고 있었다. 오늘이 방학 숙제 제출일이었다. 성실한 아이들은 약속도 잘 지킨다.


우리 학교는 다다음 주에 개학이다. 한 명 더 채용하기로 한 국어 교사를 아직 뽑지 못했다. 작년까지 함께해 주셨던 강사 선생님은 그만두셨다. 현재, 나는 유일무이한 국어 교사다.


또다시 답답함과 책임감과 애정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만둘 수 있을까. 내가 안다. 이 아이들을 두고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걸.


이 년 전, 이직을 하려 했었다. 면접을 봤고 합격을 했다. 그러다 결국 포기했다. 지금 졸업반이 되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그 아이들의 성장을 보고 싶었다. 잘 가르치고 싶었다. 담임도 아니면서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끔 그 기회를 놓친 것에 이불 킥을 했다. 어쩌면 일반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갔으면 인생은 어떻게 또 펼쳐졌을까. 지금쯤 계약 만료로 다른 학교를 찾거나 시험을 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올해도 우리 학교에서 새 학기를 맞을 것이다. 병원을 다니며 약을 챙겨 먹으며 부족한 잠을 자며 열심히 살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두렵다. 교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내 능력치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늘 허덕이며 그것을 해내 왔다. 그러다 지쳐 버렸다. 지난 학기, 나는 특히 지쳤었는데 쉼 없이 다시 새 학기를 맞는다.


방학을 잘 보낸 거 같은데 별로 쉬지 못한 느낌이다. 이틀 릴레이 회의에 술 한 잔, 그리고 다음날 온종일 평가서를 쓴 후 내 몸이 방광염에 휘말렸다.


멍하다. 마지막 주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려고 했는데 마구 일이 생기고 있다.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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