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이별

아무 일 아니었다는 식의 건조함

by 문영

"나 애매한 거 못 견뎌. 잡던지 놓던지, 맘대로 해."

"... 그럼 우리 그만하자. 놓을게."


당연히 성재가 잡을 줄 알았다. 성재의 이별통보에 희유는 아득해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데려다줘."

"그냥 버스 타고 가."

"싫어. 마지막인데 그거 하나 못해 줘?"

"알았어. 기다려."


그와의 시간을 좀 더 늘려야 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희유는 작정하고 그의 동네에 왔다. 삐걱거리는 관계에서 둘은 시간을 갖기로 했었고 며칠 전 극단 모임에서 둘은 어색했지만 마주 보는 눈빛이 애틋했다. 적어도 희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사랑은 여전하다고. 다만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어서 어색할 뿐이라고. 그 시간이 이제 기한이 다 했다고.


"오빠, 집이야?"

"응, 왜?"

"나 지금 구로역이야. 일 있어서 왔어. 오빠 집으로 갈게."

"뭐? 그렇게 갑자기? 오지 마. 내가 나갈게. 거기 별카페서 봐."


희유는 거절당할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이 년 동안 백 번은 가봤던 성재 오피스텔인데 오지 말란다. 그러고 보니, 말없이 갑자기 이렇게 온 건 처음이긴 했다. 그저 반길 줄만 알았던 게 민망하다. 그럼에도 이게 관계를 정리하는 시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희유는 관계를 풀려고 부러 찾아온 것이었다.


성재는 불쾌했다. 모처럼 쉬는 토요일이다.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으면 얌전히 기다릴 것이지 밑도 끝도 없이 내 영역에 들어오려 한다. 성재는 자기만의 영역이 중요한데 희유는 자꾸 침범한다. 어느 순간부터 희유의 모든 것이 지겨운데 그 시점에 앙칼지게 귓속을 후비고 들어온 희유의 목소리는 남은 사랑을 산산조각 냈다.




"오늘 희유 씨, 외로워 보였어요. 좀 챙겨주시지."

"이 자식 희유 씨 안 사랑해. 나랑 달라."

"야 내가 너 결혼식 사회 봤는데 희유 챙길 정신이 어딨어?"


승유의 결혼식에 역시나 희유가 왔다. 맡은 게 많아 챙겨줄 수 없으니 안 와도 된다 했는데 결국 왔다. 친구 단체 사진을 찍을 때도 희유는 머뭇거리더니 앞으로 나와서 굳이 성재 옆에 선다. 이 여자 눈치도 없다. 그래도 예뻐서 봐준다. 성재는 희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손에서 따뜻함이 전해진다.


밥을 먹고 희유에게 잘 가라고 했다. 희유는 당황하며


"혼자 가라고?"


한다. 도대체 혼자 가질 못하는 여자다.


"나 웨딩카 하잖아."

"그러니까, 조수석에 나 타면 안 돼?"

"뭣 하러 그렇게 해? 인사까지 다 끝나고 공항 가는 건데."

"오빠랑 있다 같이 갔다가 오는 게 데이트지."

"됐어. 힘들어. 오늘은 그냥 가."

"알았어."


참 바라는 게 많고 시간도 많은 여자다. 희유는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다. 성재는 희유의 저 여유가 부럽고 버겁다.


승유를 공항에 데려다주는 길에 승유의 와이프가 된 새신부에게 들은 핀잔과 승유가 이어받아 한 말에 성재는 뜨끔했다. 그런가. 정말 이제 사랑이 식었나. 성재는 집에 와서 바로 뻗었다.


다음 날, 성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 모닝 알바를 하며 편의점 폐기로 대충 끼니를 때운 후 오후엔 초등 보습학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집에 와서 저녁을 챙겨 먹고 고3 과외를 했다.


남들 다 쉬는 일요일에 나는 왜 이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할까. 한탄은 당장 갚아야 하는 카드 값에 묻힌다. 그나마 희유와의 데이트를 줄여서 이번 달은 마이너스를 가까스로 면했다.


핸드폰을 보며 연애도 못하겠다 생각할 때쯤 희유로부터 전화가 온다.


"여보세요."

"오빠 너무한 거 아냐?"

"뭐가?"

"어떻게 어제 그렇게 헤어지고 연락 한 통이 없어?"

"아, 시간이 너무 늦기도 했고, 피곤해서 바로 잤어."

"오늘은?"

"오늘 내 스케줄. 너 알잖아."

"악! 그놈의 스케줄, 스케줄!! 난 뭐 일이 없는 줄 알아? 톡 하나 보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성재는 놀래서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희유가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몰랐다. 그저 고분고분한 사람인 줄 알았다. 고분고분함이 최고의 장점이었다. 성재는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진짜 짬이 나지 않았다고. 그런데 우리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지금은 그게 필요하다고, 적어도 난 그렇다고. 희유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

"내려와."


희유가 옆좌석에 탄다. 추위를 많이 타는 희유를 위해 온열시트를 채운 좌석이다. 희유는 버튼을 누르지 않고 몸을 떤다. 슬픔인지 추위인지 오한인지 알 길이 없어 성재는 히터 온도를 올렸다.


고요를 견디지 못해 라디오도 틀었다. 희유가 좋아하는 클래식 채널이다. 드디어 강남 한복판, 희유의 아파트 앞이다.


"다 왔어. 잘 가."

"그게 전부야?"

"잘 지내. 아프지 말고. 조심해서 다녀. 넘어지지 말고. 헤어졌다고 술 마시지 말고."

"나를 놓는 이유가 뭐야?"

"알잖아. 우리는 결코 맞지 않다는 거."

"사랑하긴 했었니?"

"응. 그만 내려."

"진짜 나쁘다."

"..."


희유가 내려서 걷는다. 휘청거리는 게 연긴지 진짠지 모르겠다. 성재는 차를 돌린다. 눈앞이 부예지지만 잘했다고 생각한다. 알바와 학업, 임용고시 준비, 쪼달리는 생활비에 철 없이 여유롭기만 한 희유가 들어올 공간은 없다.




희유의 첫사랑이 끝났다. 스물두 살, 방학 중에 작가를 모집하는 극단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가 잠시 극단에서 연기를 했다. 취미 동호회였다. 그 극단에서 자기에게 관심을 보였던 여덟 살 많은 성재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그의 애정공세에 속수무책으로 사랑이 활짝 피어났다. 그는 부유한 대학생 같았다. 4학년 휴학 중이었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며 취미로 이 극단에 들어 왔다고 했다. 차가 있었고 구로동 원룸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중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그가 끝낸 사랑이다. 12월의 한기가 몰려오는데, 이별을 믿을 수 없는데, 성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일도 읽지 않는다. 원래도 잘 안 받는 전화였다. 오기로 더 걸었더니 바로 사서함으로 넘어가고 메시지가 온다.


[질척대지 마. 이렇게 질척대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안 사귀었을 거야.]


희유는 멍하니 메시지를 보다 밤늦도록 잠들지 못한 채 운다. 두고 봐라. 나는 술통에 빠져 살 거다. 침대에 누워서 이를 악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