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이별

너와 나의 사정

by 문영

진동이 울리는 걸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사람은 나 없이 어떻게 살았단 말인가. 희유는 받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 통화이고 우리는 이따 저녁에 만날 것이고 지금은 오후 한 시이다. 무슨 할 말이 이렇게 있어서 전화를 또 한단 말인가.


성재는 희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초조해진다. 마음이 변했나? 내가 너무 아저씨라서 싫은가? 너무 질척대는 것처럼 보일까? 희유가 연애가 처음이듯이 성재도 그러하다. 나이만 여덟 살이 많을 뿐 연애가 처음이다. 성재에겐 온통 희유 생각뿐이다. 여태껏 이렇게 맑고 귀여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 사람이 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성재는 전화를 받지 않는 희유에게 문자를 보낸다.

[희유씨, 바빠요? 점심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문자를 보내고 일 분, 이 분, 삼 분.... 오 분이 지나도 희유에게 답은 오지 않는다. 성재는 차키를 챙긴다. 오늘 희유는 집에 있을 거라고 했다. 점심을 안 먹었으면 같이 점심을, 아니면 커피를 마시고 극단에 가자고 할 참이었다. 집에 깜짝 방문하면 희유가 좋아할 것이다. 성재는 희유를 만날 기쁨에 헐레벌떡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성재가 대학 입학 선물로 받은 오피스텔과 자동차다. 진짜 독립을 했고 부족함 없이 무엇이든 누리고 살았다. 다만 맘에 드는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했었다. 자기 인생에서 그거 하나 아쉽다 생각했는데 드디어 희유가 나타났다. 너는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니. 역시 보물은 저어기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꽁꽁 숨어 있었던 것이다.

희유는 멍하니 문자를 바라본다. 이 정도면 집착 아니야? 나 이렇게 연애해도 되는 거 맞아? 아니 돈도 많고 얼굴도 잘생긴 사람이 왜 혼자지? 이렇게 스토킹하니까 혼자였던 거 아닌가? 괜한 불안감에 휩싸인다. 성재는 지금까지 희유 인생에 없던 사람이었다. 갑자기 비집고 들어와서 훅 자리를 차지하는 성재가 두렵기도 하다. 희유는 잠시 성재를 털어버리고 자기 삶을 살기로 했다. 엄마가 두고 간 설거지를 하고 집 정리를 시작했다. 분주히 움직이는데, 전화가 온다. 성재다.

"희유씨? 나 집 앞인데, 나올 수 있어요?"

"네? 지금요?"




과거를 생각하며 희유는 멍하다. 자기 없이 안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문자가 왔고 문자에 답을 안 하면 사람이 왔다. 그랬던 성재가 이제 이별을 고하고 감감무소식에 질척이지 말란다. 질척이지 말라는 대사는 그의 것이 아니다. 연애 초반, 희유가 했어야 하는 대사이다. 성재가 언제부터 갑자기 달라졌던가.




성재가 돌아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한 달이었다. 성재가 갑자기 여러 일을 시작하더니 바빠졌고 희유는 늘 외로웠다. 희유의 전화를 안 받기 일쑤였어서 이제 한 번에 통화 연결이 되지 않는 게 희유에겐 너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희유는 습관처럼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아니 전화를 안 받으면 못 받을 일이 있는가 보다 하면 되지, 왜 계속 전화야?"

"오빤 늘 안 받잖아. 언젠가 받겠지 싶은 거지."

".... 희유야."

"왜 이렇게 사람이 변했어? 내가 전화 안 받음 불안해서 찾아오던 사람 어디 갔어?"

"그때는 너를 잡아야 했고, 이제 너를 잡았으니 내 삶을 열심히 살아야지."


뭐라고? 잡은 물고기라는 거지? 희유는 어이가 없이 성재를 쳐다봤다. 그런 희유를 성재가 꼭 끌어안았다. 희유를 완전히 차지하는 데 한 달이 걸렸지만, 집이 몰락하는 데는 얼마가 걸렸는지 성재는 모른다. 갑자기 아버지 카드가 정지됐고 본가는 경매에 넘어갔으며 아버지는 잠시 피해 있겠다 하더니 연락이 두절됐다. 성재에겐 오피스텔과 차, 그리고 책임져야 하는 자기 인생이 있었다. 성재의 세상이 달라졌다. 모든 걸 할 수 있던 세상이 모든 걸 해내야 하는 세상으로 돼 버렸다. 학비도 용돈도 손수 벌어야 하는, 순식간에 바뀐 세상이 성재에겐 현실감도 없고 감당이 되지 않았다. 희유에게 자초지종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연애 초반이었고 희유만 만나면 그저 좋았다. 자기 삶을 알게 되면 희유가 떠날까 두려웠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희유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가 많았고 희유는 그래도 늘 그런가 보다 해 주는 착한 애인이었으나 여덟 살 어린 넉넉한 집 공주라는 사실은 성재에게 부담으로 자리잡았다.


희유는 어렴풋이 성재의 집이 부유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기에게 잘 보이려고 넉넉한 척했나 보다 생각했고 어려운 성재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겠다 싶었다. 엄마가 없는 그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고 싶었다. 희유에게 성재의 오피스텔은 작은 궁전이었다. 그냥 이 오피스텔에 쏙 들어가 둘만의 인생을 살아도 좋겠다고 늘 생각했었다. 그만큼 성재는 희유의 세상에 전부가 되어 버렸는데 갑자기 그가 쑥 빠져나갔다.




성재를 다시 보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어떤 날은 성재 오피스텔 앞을 가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성재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메시지에 답도 없었으며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정도 질척였으면 됐어. 희유는 서러움과 분노,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왔다.

희유와 헤어지고 성재는 오피스텔과 차를 정리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희유가 있으므로 악착같이 지키던 집과 차였다. 희유가 좋아하던 공간들이었다. 희유를 위해서 지켜내는 기쁨이 어느 순간 희유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고통으로 바뀌었다. 늘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좋은 곳을 가 보고 싶어 하는 어린 공주 희유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넌 내 딸이 아닌데, 왜 내가 널 키우는 느낌이 드니.


희유와 이별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정리였다. 오피스텔과 차를 정리하고 하던 아르바이트도 정리했다. 새로운 과외만 몇 개를 잡고 집은 고시원으로 옮겼다. 이제 조금 여유를 갖고 공부와 학업에 집중하려고 했다.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간간이 희유의 메시지와 메일, 전화를 받았으나 수신하지 않았다. 지겨워. 성재는 낮게 중얼거렸다.


바뀐 삶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봄이 오는 활기가 느끼던 날 성재는 문득 희유 생각이 났다. 질척대지 말라는 문자를 보낸 이후 희유의 질척거림이 사라졌다. 삶과 시간의 여유는 생겼는데 마음은 텅 비었다. 성재는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며 살고 있다. 히유의 환한 웃음이 갑자기 생각났다. 무엇이든 괜찮다고 품어주던 웃음이었다. 커피라도 사겠다고 주유라도 한 번 해 주겠다고 나서던 애인이었다. 그런 애인을 철딱서니 없는 공주 취급을 했던 것이 자기였음을 성재는 문득 깨닫고 마음이 아려 왔다.


희유와 헤어지고 한 번도 들어가지 않던 극단 카페에 들어가 보았다. 카페엔 희유의 흔적도 없다. 희유도 역시 활동을 하지 않았나 보다. 잘 살고 있나. 희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인스타도 희유가 쓰던 블로그도 새 피드가 없다. 희유의 시계가 멈춘 느낌이었다. 희유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버려졌다. 버려졌다는 생각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희유는 질척대는 집착녀였다. 성재와 사귀는 내내 자신이 그런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할퀴었다. 희유는 무의미하게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며 지냈다. 성재가 지독히도 싫어하던 술이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내가 뭘?"

"네 미래는 생각 안 해? 내가 성재씨에게 너랑 헤어지라고 했는데 그 책임감에 널 받아주고 있는데 진짜 더는 못 봐주겠다."

"네가 헤어지라고 하면 헤어지는 거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왜 책임감을 느껴? 내가 차인 건데."

"희유야 이제 그만해. 나도 너랑 술 마시는 거 이제 그만하려고."

"알았어. 오늘까지 마시고 그만할게."


가끔 생각했다. 내가 세상을 떠나버리면 성재는 울까. 장례식장엔 방문할까. 희유는 막막했다. 또 하루를 살아내야 함이. 자기는 만신창이가 됐는데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그 세상 속에서 성재가 변함없이 살아갈 거라는 생각에 더 견딜 수가 없다. 성재는 원래부터 SNS를 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극단에도 발길을 끊었다 한다. 둘이 함께한 세월이 이 년이 넘고 그 세월 동안 모든 걸 공유했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의 흔적을 찾을 방법이 없다. 우리 둘을 잘 아는 친구조차 이제 같이 술을 안 마신단다. 엄마도 그만 늦게 다니란다. 술만 마시고 다니는 딸의 꼴을 볼 수 없다며 용돈을 끊었다. 거울 속에 비친 희유는 푸석하기 짝이 없다. 희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사랑의 시작은 둘이 마음을 나누면서이다. 그런 사랑의 끝은 둘이 마음을 정리할 때이다. 사랑이 혼자 완성되지 않듯이 이별도 혼자 할 수 없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이별을 완성했냐고.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나의 이별은 이제야 완성됐다고."


박수가 쏟아졌다. 희유는 일어나서 관중에게 인사했다. 자기 소설을 낭독하는 자리가 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재와의 에피소드를 소설로 썼고 공모전에 냈다가 웹소설 제안을 받았다. 희유는 갑자기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 강연을 다니다 마지막화를 낭독해 달라는 요청으로 낭독회에 참석했다. 낭독이 끝나고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성재가 조용히 회장을 빠져나갔다. 너의 이별이 완성되었구나. 다행이다, 희유야. 성재의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