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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May 29. 2024

낭만이 사치가 되어버린 대륙, 유럽

다시 찾은 영국과 벨기에는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고 말았다.

2009년 7월, 기나긴 영국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그리고, 2012년 7월, 1년간 벨기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다시 찾은 영국과 벨기에, 이 두 국가는 37세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낭만보다는 지루함 이상의 빈곤한 마음과 여유는 찾아보기 힘든 슬픔과 애환을 고스란히 안겨주었다. 


작년부터 벼르고 있었다. 이제는 돈 좀 벌었으니, 궁핍했던 유학생 시절을 화끈하게 보상하기 위해 여행을 감행하자고. 그래서,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궁핍했던 영국과 그다음으로 궁핍하게 지냈던 벨기에 재방문 결정을 내렸다. 이 두 국가를 방문하기 한 달 전부터 World Best 50 레스토랑과 바 리스트를 섭렵하고, 미슐랭 가이드도 틈틈이 찾아보며, 내 분수껏 사치할 수 있는 곳이라면 다 좋으니, 거의 무엇에 홀린 듯 예약 이메일을 보냈다. 가난한 유학생에게 한없이 냉정했던 이 모든 사치스러운 곳들은 30대 중반을 지난 돈 좀 있어 보이는 아시아 여성에게 한없이 나긋나긋했고, 나는 사치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모든 곳에 이메일을 보냈다, 그때 보자고. 


그렇게 분수 넘은 행동으로 여행길에 올랐건만, 나는 런던에 '입성'하자마다, 15년 전 1파운드 아끼자고 1시간을 걸었던 유학생 생활을 차마 잊지 못한 애송이로 돌아갔다. 런던 날씨에 말도 안 되게 화창한 2024년 5월 17일 오후 3시, 히드로 공항 부근 런던 교외의 모습, 하나같이 촘촘하고 붉은색 벽돌을 쌓아 올린 집들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나 이곳에서 정말 많이 상상했고, 꿈을 꾸었는데." 라며. 


다시 영국에서 살 자신은 없건만, 이곳에 '돈 걱정 없는' 30대 중반 직장여성으로 이 땅을 밟은 나의 소회는 그냥 행복했다. 비싸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도시에 좀 피곤하면 블랙캡 택시 타도 지갑 사정이 나쁘지 않은 정도의 직장인이라니, 이런 것이 다름 아닌 출세 아닌가란 웃기는 생각에 피식 웃기도 했다. 


화창한 런던의 날씨, 그리고, 런던보다 더 화창하게 나를 반겨준 노리치. 잉글랜드의 모든 곳들은 나를 환영하듯, 이 도시가 가장 까다롭게 구는 날씨도 나의 '귀환'을 환영했다. 런던과 노리치에서의 짧은 5일 모두 좋았다. 하루에 5시간만 자고, 계획한 모든 일을 했고, 하루에 평균 3만 보(20km)를 걸었으니, 지칠 만도 한데, 어떻게든 한 시간이라도 더 지내보려고, 무거운 눈꺼풀을 동여 메고 잠도 아꼈다. 


하지만, 런던과 노리치 모두 내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 동경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브렉시트로 EU와의 탄탄한 유통망의 혜택을 누렸던 영국의 식료품 물가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학창 시절 줄곧 찾아냈던 Buy 1 Get 1 Free 스티커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런던 시내 곳곳은 눈물로 밤을 지새운 부랑자들이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구걸했다. 런던은 마치 유럽의 뉴욕과도 같아서, 유럽 내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정작 미슐랭 레스토랑과 호텔의 바들은 동유럽인들로 가득했다.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의 런던 서비스시장은 그야말로 동유럽인들이 점유했다고 해도 과장되지 않았다. '동유럽인들'의 서비스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모든 서비스 업종이 극도로 상업화되고, 영국인들보다 아무래도 인건비가 저렴한 동유럽인들이 온갖 진상고객들의 비위를 맞추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자정을 넘어가면서까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내가 생각했던 영국과 사뭇 달랐다는 점이다. 


노리치 역시 내가 기억하는 모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15년 만에 재외 한 엠마는 이 모든 변화가 코로나19와 브렉시트를 기점으로 이루어졌고, 결국 온라인으로 모든 상업 활동을 하다 보니 임대료와 인건비가 비싼 오프라인 상점의 유지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노리치는 내가 졸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귀여움과 다정함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지만,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궁핍함으로 인한 상당한 피로감이 시민들의 얼굴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벨기에,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럽인들은 내가 기억 속에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여유롭지 않았고, 예전보다 모든 것들을 신경질적 혹은 귀찮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초청대상이 아닌 도시에 억지로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벼르고 별렀던 유럽여행은 그렇게  끝나고, 그냥 당분간 최소 3년은 이 땅을 밟고 싶지 않다는 느낌으로 브뤼셀 공항을 떠났다. 


세상은 2개의 전쟁으로 시끄럽고, 모든 국가들은 고물가와 고금리로 힘들다. 중산층의 몰락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은 여유와 낭만보다는 생존과 절약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유럽의 낭만은 왠지 20세기에서나 있을법한 전설과도 같은 소리라고 해야 하나. 이 전 글에 쓴 것처럼, 마치 21세기에서 20세기의 사랑을 외치는 것만 같은, 불협화음을 유럽 여행 내내 느꼈다. 


시간이 지나가서, 내가 바뀐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청춘을 보낸 낭만과 철학이 고이 깃든 유럽과 영국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인지 답을 찾지 못한 채 떠났다. 아름다운 고성과 건축물, 우리가 학교에서 '명화'라고 배웠던 모든 그림들이 도시 곳곳에 널려있건만, 이 모든 예술작품들에 대한 조예도 존경을 잊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사람들, 혹은 이 삶이라는 게임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구걸을 통해 '삶'보다 '생존'에 목메고 있었다. 


그래서, 추억은 추억으로만 간직하라고 했던 건가. 낭만이 사치가 되어버린 유럽 여행 이후, 내가 쉼 없이 상상했던 이 대륙에서 단 한 번의 영감과 시상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점에 슬퍼하며, 나의 오만한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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