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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n 10. 2024

구체적인 슬픔

원인 없는 슬픔을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란.

어젯밤, 달빛에 기대어 비율도 제멋대로인 보드카 마티니를 벗 삼아, '커피가 식기 전에 (카와구치 토시카즈 작)'의 두 번째 이야기를 읽었다. 코하케와 후사기의 이야기.


스토리는 거두절미하고, 코하케와 후사기 부부의 애틋함, 그리고 태생이 슬픔으로 점철된 후사기의 인생, 그리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부인을 위해 힘겹게 쓴 편지. 그 편지의 내용은 아주 단순한 문체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의 구체적인 슬픔이 고스란히 녹아든 글을 읽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스스로 통제가 불가능한 치매라는 가혹한 병에 걸린, 후사기.

카페 주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러브레터를 받을 줄 알고, 용기를 내어 과거로 돌아갔건만,

코하케는 후사기가 차마 말로 건네지 못한 처절함, 미안함, 비통함 그리고 혼란함이 고스란히 내재된 글이 담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남편으로서가 아닌, 온전히 코하케라는 사람을 온몸을 다해 사랑하는 한 사람이 너무 미안해서, 하지만 그 미안함을 어찌할 줄 몰라, 슬픔으로 무장된 글로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한 행위였던 것이다. 이 장면이 얼마나 슬펐는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내가 글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보통, 눈물이라는 생물학적 반응은 원인이 있을 때 발현된다.

억울해서, 아파서, 분에 못 이겨서 등등 어떠한 원인이 감정의 소용돌이를 몰고 올 때 비로소 형해화되는 것이 눈물인 셈이다.


그러나, 후사기의 글처럼, 그냥 태생이 쓸쓸하고 슬픈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슬픈 눈을 가지고 태어났단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알 수 없는 슬픔의 소용돌이 내  두 눈에 박혀버려, 더 이상 빼낼 수 없어 운명과도 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슬픔이 심지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퇴폐적인 마음을 지닌 자이니, 슬픈 것을 단순히 '부정적'이라고 함부로 정의하지 않는다.

후사기처럼, 구체적으로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정도의 인간은 아니지만, 나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이 내 정체성의 8할은 차지하고 있으니, 슬픔이 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라 해도 부인할 수 없다.


요 며칠 전, 엄마와 영상통화를 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엄마는 5월 말 따스한 낮은 봄 햇살이 집안 곳곳을 내리쬔 토요일 오후, 내 방 발코니에 있는 2인용 붉은색 소파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거실식탁이 아닌 내 방에서 그 것도 혼자.

아빠는 공부한다면서, 밥도 각자의 시간에 맞춰 먹는다고. 엄마는 그렇게 혼자서 보내는 시간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언제나 씩씩한 우리 엄마지만, 그날따라 혼자서 햇빛을 벗 삼아 먹는 점심식사시간을 실제로 보니, 그냥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라도 저곳에 같이 지낸다면, 엄마랑 식탁에서 대화도 몇 마디 나누면서 밥을 먹을 텐데."


타지 생활을 하는 두 딸들 때문에 우리 엄마와 아빠는 허전한 공간이 일상이 되었다. 20년 전에는 이메일과 유로 스카이프만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기술을 발달로 언제든 영상통화를 무료로 할 수 있다는 점에 안도하며, 그렇게 서로의 말동무가 되어주지만, 그래도 아쉽긴 한다.

그날 엄마의 모습이 그냥 이유 없이 슬퍼 보였다.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외로움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엄마는 구차함을 경멸하는 사람이니, 이 것을 차마 이유라고 붙이긴 어렵다.


우리 엄마를 보니, 그냥 슬픔을 타고난 나의 천성이 일정 부분 엄마에게서 온 유전인자가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이유 없는 슬픔 속에 한참을 울어대어도 해소는커녕 슬픔의 블랙홀 속에 내 인생 전체가 '딜(deal)'하자고 달려들기까지 한다. 넌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인생의 카드를 손에 쥐고 태어났다고. 그렇게 내 양쪽 귀에 속삭인다.


프랑수아 사강은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써서, 18세 소녀 세실의 아빠와 애인 사이의 미묘한 감정,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다고 믿었던 열병과도 같은 휴양지에서의 연장자 소년에 대한 마음이 아빠 애인의 생각지 못한 죽음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책의 제목처럼, '봉쥬르 트리스테', 슬픔이 피하지 못하고 숙명처럼 맞이해야 하는 소녀의 성장통을 그린 책이다.


나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슬픔을 맞이하는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이 익숙하고 좋은 사람이 되었는데, 혼자 있어서 즐겁지만, 그래서 슬프기도 한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현듯 이 복잡한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나 말고 누가 있을까. 란 생각이 덮치면 괜히 눈물부터 난다. 단순한 인생이 행복하다고 사회와 사람들은 그렇게 세뇌시키지만, 나는 복잡함이 생각과 정서를 모두 지배하기 때문에,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구체적인 슬픔. 그 슬픔이란 원인을 알 수 없는 태생적으로 복잡한 어떤 감정인 것 같다. 차마 정의를 내리기도 힘든 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나라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슬픔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 역시 궁금하기도 하다. 나의 구체적인 슬픔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나는 이 모든 슬픔을 두려움 없이 온전히 아름답다고 치부하며 감내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복잡한 질문을 던진 채 오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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