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5년 만에 출장길에 올랐다. 한 달에 3-4번씩 국내외 출장을 다닐 때는 삶의 루틴이 깨져서 다시는 출장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건만, 인간의 마음이란 실로 사악하다. 타자기와 함께 사무실이라는 새장에 갇힌 신세로 몇 년을 지냈건만, 출장 좀 보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야 말았다. 그랬더니 온 간만의 기회. 그리고 동부 자바 말랑, 바투(BATU) 지역.
한 7-8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어렴풋 기억나기로는 Alun-Alun이라는 말랑 시내 광장을 거닐며 이곳의 향토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라원(Rawon) 음식점을 거리에서 수도없이 본 기억뿐이다. 라원은 일종의 자바식 소고기 수프인데, 끌루악 넛(Keluak nut)이라는 허브와 향신료 중간쯤에 있는 나무 열매를 양념으로 사용해서 색깔이 거무스름하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기에 이 음식을 맛본 적은 없으나, 동부 자바 향토음식인 이 라원은 말랑의 별미라고 알려져 있다. 이곳은 라원 말고도 브로모 화산과 열대지역이지만 섭씨 20-26도의 선선한 기후를 자랑하는 곳이라서 땀도 나지 않고 공기도 맑아 쾌쾌한 매연이 도시 전체를 뒤덮은 자카르타와는 사뭇 다른 곳이다.
이러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이 지역은 아니나 다를까 네덜란드가 지배했을 당시 그들의 거주 선호 지역으로 말랑을 꼽았으며, 지금도 말랑 옆 수라바야(Surabaya, 인도네시아 제2의 도시) 거주민들이 주말마다 휴양을 즐기러 오는 곳이기도 하다.
말로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한 이 아름답고 편안한 지역에서 나는 이틀간 농촌개발 빈곤퇴치를 주제로 한 마을 네트워크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는 아세안 10개국들의 도농 간 격차 해소는 물론 마을단위의 공동체 형성을 총한 경제자립과 지속가능한 관광상품 개발을 도모하고 각 마을 간 성공사례를 공유하기 위해 인도네시아 정부가 조직한 협의체이다. 나는 이 분야 전문가는 아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를 비롯한 역외 국가들과의 협력을 도모하고, 조금 더 산업화를 빨리 이룬 국가들 (경제소득이 높다고 선진국이라는 말로 통칭하고 싶지 않다.)의 경험과 노하우 공유 기대해서 초청대상에 포함된 것 같다.
이번 회의 참석을 통해 나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히 내가 위정자들처럼 선민사상을 느끼다니, 흠칫 놀라는 경험도 여러 차례 했다.
이 회의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스마트화를 이룬 마을(1000여 명 단위) 이장님들이 모여서 각자의 우여곡절 사례를 공유하고, 어떤 분들은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전통문화마을 관광상품 개발 사례들을 공유해 주셨다. 영어가 서툰 분 들 이어서 실시간 통역에 의존해서 각자의 사례를 발표하셨는데, 모든 분들이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마을 소득을 증진시켜 주민 모두 조금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부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그분들에게는 엄청난 성과, '출세'였다. 그리고, 그들의 인식 속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나를 극진히 대접해 주셨는데, 그럴 때마다 울컥함을 느꼈다.
나는 전혀 감성적인 인간이 아니라서 웬만해서 그리고 특히 인간과 교류하는 부분에 있어서 감동받는 경우가 거의 드문데, 이상하게 이번 회의 참석동안 순박함과 순수함에 포섭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분들의 미소,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어떻게든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성심성의를 다하는 모습이 부담스럽기보다 그냥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이 차린 잔칫상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내 기준으로 깔보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8시간 회의 내내 다짐했다.
나의 울컥함은 하지만 다른 한 면에서 보면 무의식 속에 깔린 선민사상 때문에 비롯된 주제넘은 연민의 감정인 것이다. 그리고, 몇몇 국가들, 소위 '선진국'이라는 딱지를 온몸에 붙인 국가 대표로 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언 차례까지만 참석하고, 그들의 의견을 '시간낭비'라고 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그래서 오후 내내 회의장은 한산했고, 나는 왠지 모르게 이 회의장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경제적 지표만으로 국가의 수준을 논한다는 것은 정말 주제넘은 짓이다. 물론 '발전'에 기준이라는 것이 있고, 이 기준은 아무래도 숫자로 정해진다는 의견이 중론이기에, 이 수준에 맞는 국가들을 앞서나간 국가드을선진국으로 말한다. 하지만, 과연 한국을 비롯한 이 모든 국가들이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간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는데, 나도 지금 돌아보면 반성할 만 일이 수도 없이 많다. 화폐가치의 논리만을 들이댈 때, 싱가포르를 제외한 동남아 국가에서는 한국에서 누리기 어려운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할 때가 더러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주제파악하자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 회의가 그런 다짐을 상기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우리 눈에는 답답하고 느리게 보여도 모든 국가와 국민들은 저마다의 박자 속에서 환경에 적응하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마련하는 것이 인생이다. 이 모든 것을 존중하는 것 또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회의 참석을 계기로 주제넘게 선민의식을 갖지 말자고, 나의 무의식에 체벌을 가한다. 그리고, 함부로 내 기준에서 판단하지 말자고, 섣부른 판단은 편협한 사고를 위한 안락한 첫발임을, 그래서 절대 들여서는 안 되는 길임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