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리나라는 군부독재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지만, 내가 태어난 그날, 대통령 직선제를 천명한 629 선언으로 비로소 민주주의의 핵심인 투표권 행사의 보편화와 권리가 이루어졌다. 물론 629 선언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토대를 만든 629 선언이 발표된 날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민주주의,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찬다. 우리 부모님도 내 이름을 민주로 지으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30년 넘게 나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시대에서 자랐고, 표현과 생각의 자유라는 것은 쟁취가 필요없는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라고 여겨왔다. 그야말로 마치 생명의 일부라고 그렇게 생각해 왔다.
다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권위적이고, 상명하복식의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국민 대다수가 스스로 한민족에서 가장 어울리는 국가운영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민주주의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이 시스템은 마치 국가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목숨과도 같다고 그렇게 동일시해오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라는 의미이며, 민주주의의 기원인 democracy 역시 그리스어 demos - 사람, kratia - 다스림의 합성어로 다수의 국민들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으로 정한 원칙과 규칙으로 국가라는 단위를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목숨과도 같은 민주주의의 존립에 별안간 위협을 가하는 충격적인 일이 2024년 12월 3일에 밤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 일이 민주주의 체제 확립을 아직 이루지 못한 국가 또는 우리와 체제가 다른 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하고 생각했거늘, 도대체 이게 21세기 세상에서 가장 힙(hip)한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나는 그 어떤 정당도 지지 않지 않는 일명 무당층이다. 그래서 원칙이 중요하고, 그 원칙과 양심에 따라 의사결정을 내리는 편을 지지한다. 이것은 정파적인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개념이다.
계엄이라는 터무니없는 의사결정을 내린 당사자는 의사결정에 도달한 배경을 납득할만하게 설명하지 못했으며, 일명 포고령이라고 하는 것들 조차 문맥상 전혀 일관성 없는 글자들로 난무했다. 마치 심술나서 새 크레파스가 죄다 뭉뚝해질때까지 분노의 낙서를 해놓은 것만 같은 유치하고 위험한 행패는 오밤중 대한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40여 년간 지켜온 민주주의의 전복을 막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였다. 국회의사당으로 시민과 국회의원들이 모였고, 사투끝에 2시간 30여분 만에 계엄령 해제가 이루어졌다.
시급한 문제 해결 후, 12월 7일 오후 5시 법적절차를 밟기 위해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대신하여 준엄한 법의 심판을 내리기 위해 국회에 모였다. 그러나, 결국 그 누구도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 대해 법적 처벌을 내리지 못했다. 이 씁쓸한 전모의 원인은 다름 아닌 기득권들의 횡포라고 밖에 다른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총리라는 사람은 국민의 슬기를 발휘해야할 때라면서, "정부가 책임지고 국민 여러분을 지켜준다."가 아니고 "국민이 국가를 도와주셔야 한다."는 소리를 국민을 위한 담화라고 했다. 마치 모든 사태수습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된거 같았다.
이기적인 인간의 그 민낯은 마치 자기들이 국운을 쥐고 있는 듯 착각 속에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을 심적 불안감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는지 알기나 할까. 전국민적 공황장애가 예상되는 그 이기적인 결정에, 그 순간에 느낀 것은 소위 '잘났다'라고 하신 분들 100여 명에 의해 국헌의 문란하게 한 자의 처벌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패배감과 불공정이다. 무늬만 민주주의였지 국민적 열망과 투쟁으로 이룩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시스템의 여럿 허점들도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빈정거림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소리인가 보다 란 체념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 자유로운 사고, 흑백논리가 지배하지 않는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민주주의의 시민이라면 얄팍한 안위에 앞서 깨어있는 시민의식으로 행동하기 무섭다면 생각이라도 여러 번 곱씹어야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 없는 사회에 민주주의는 녹슨 간판에 불과할 뿐이다.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말도 못 하게 어지러워진 우리 아름다운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깊은 우울감에서 깨어나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일반 소시민들이 지켜온 나라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우리를 대표하는 자들에게 우리의 무서움을 여과 없이 보여주어야 한다. 너희들은 특권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섬기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불안함에 지배되지 않도록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
깨어있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길 바라며, 용기를 발휘하여 아름다운 준법정신이 우리 사회 전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