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4일, 오후 4시 다시 한번 국회의사당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 투표를 추진했다. 그전 주인 12월 7일 혹자는 비겁하다고 했던 일부 국회의원들의 본 회의장 퇴장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실망했던 터라 12월 14일은 여러 가지 감정이 전국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복잡한 감정이란 마치 노여움, 분노, 실망, 안타까움, 불안함, 초조, 걱정, 그리고 슬픔이라는 다양한 실타래가 엉킬 때로 엉켜 더 이상 그 매듭을 풀 수 없을 정도로 해진 모습으로 방치된 모습이라고나 해야 할까. 진영논리를 벗어둔 채 바라본 2024년 12월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과 '지옥' 보다도 더 극적이고 처절하게 양극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닌 일명 중도파 또는 무당층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국민들은 걱정과 불안을 떨치고자 그 추운 날을 뒤로한 채 여의도를 찾은 듯했다. 마치 양심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신념과 원칙을 수호하자는 순수한 의도와 함께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생각과 각기의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렇다. 누구 편을 쉽사리 들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사람들은 내가 '우유부단'하다고 말하곤 한다. 이것은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들의 경솔함이라고 본다. 실은 우유부단한 것이 아니라 이 편도 맞고 저 편도 각자의 사정과 논리에서는 나름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당신은 맞고, 당신은 틀리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가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선진 민주공화국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계엄을 선포한 것은 적절치 못했고, 그것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기본 체제로 삼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불안감을 조장하는 국민의 대표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다는 것이 여론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에 대한 결론을 국회라는 국민을 대표하는 집단에서 절차적 하자 없이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그렇게 국민들을 큰 소리로 목청을 높여가며 요구하는 각자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지도자를 옹호하는 집단도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의견 개진과 행위 역시 공권력의 개입 없이 이루어졌다. 모든 의견 개진을 두려움 없이 그리고 자기 검열 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인 것이다. 그렇게, 국민들은 각자의 생각과 입장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실현을 위해 정부와 국회의원이라는 공무원에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12월 14일 오후 5시가 넘어서 탄핵 가결이라는 결과가 선포되었고, 비로소 사람들은 국민과 입법기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날은 마무리되었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원칙을 지키고자 버버리 코트를 입고 국회 담장을 넘었던 국회의장의 발표는 마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보다도 통쾌한 쾌감을 안겨주었다. 행여나 1표라도 모자라서 또다시 시위하고, 싸움과 분노가 깃든 여의도를 만들면 어쩌나란 걱정이 앞섰기 때문에, 그의 발표는 매우 커다란 안도감을 건네주는 어른의 위로와도 같았다.
이후 나머지 일은 민주주의에서 정해놓은 사법기관의 합리적인 절차에 의해 결정될 일인 것이다. 나와 같은 일반 소시민들은 법은 '정의구현'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법'은 해석의 여지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는 도구적 측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이 되었든 '절차'의 정당성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납득가능한지 그것을 가려보자는 의견도 여러 번 제기된다.
그 무엇이 되었든 '나는 맞고, 넌 틀리다.'란 이런 접근은 극단적인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 뿐이다. 완벽한 선과 악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은 공존하는 것이고, 우리도 상황에 따라서는 적이 내 편이 될 수 있고, 내 편이 이었던 사람이 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나의 신념과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성숙하고 불안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이번 사태를 돌이켜보며, 유연한 뇌의 사고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기 검열 없이 남에게 비난이 아닌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용기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 그 과도기에 한국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 이상은 얄팍한 진영논리로 일차원적인 것에 빠르게 순응하는 사람들을 호도하고, 내편과 네 편을 가르는 행위는 성숙한 민주주의에서 쉽게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바라는 모습은 이상적인 것 혹은 허상에 불과하며, 보는 이에 따라서는 이상하다고 또는 절대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그들의 가치관과 입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개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의견을 수용한다. 이 모든 의견에 대해 손가락질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는 것, 입장과 의견이 다르다고 강제로 처단해서는 안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연습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