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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l 02. 2023

블랭크 마인드

심각한 후유증

정말 집중하는 게 힘든 요즘, 내 눈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 심장이 정신을 못 차린다. 그리고 내 눈은 정말 퇴폐하기 그지없는데, 결국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 떠돌며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게 하루 일과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정말 마음이 허하고, 특히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정신상태가 꼬일 대로 꼬인 여자랑 살아야 해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둘 아드하(Idul Adha)라는 이슬람 희생제 명절을 갑자기 이틀 연장하면서 예정에 없는 연휴가 생겼다. 연장휴일이 선포되자마자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비행기표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아무런 계획 없이 자카르타 옆동네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표를 2박 2일 일정으로 끊고 말았다. 딱히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도시국가는 아니지만 싱가포르 진(Gin) 양조장 투어도 급 예약하고 시내가 아닌 외곽 하이킹 일정까지 일사천리로 일정을 계획했다.


6월 29일, 나의 36번째 생일 밤, 그렇게 즉흥적으로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꽤 살아서 혹여나 마주칠까 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을 죄다 피했다. 이튿날 계획했던 하이킹 일정을 취소했다.하늘이 구멍난 것처럼 쏟아지는 폭우는 마치를 나에게 엿을 먹이는것만 같았다. 어쩔수 없이 몸부림치게 가기 싫었던 몰에서 장대비를 피신했다. 그동안 걷지 못했던 걸음 수를 자기 위로하듯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특히 걸을 때 옛날 생각을 많이 하곤 했는데, 요즘엔 그마저도 게으르고 힘겨워서 잘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플러팅이 체질인 줄 알고 주로 혼자서 여행했던 터라 모르는 나그네들과 애틋함을 품은 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시는 못 볼걸 알기에 속 깊은 대화를 하기도 하면서 정을 나누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기혼자라서 그런 재미도 포기했다. 오히려 남편과 다니면 반지를 안 끼는데 혼자 있을 때는 무조건 낀다. 모든 플러팅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가끔 추근덕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 성가시다. 제발 혼자 있는 시간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이번 싱가포르 여행 중 많은 녹지를 일부로 찾아서 걸었다. 싱가포르 하면 마리나베이 샌즈, 오차드 쇼핑 거리, 고층 빌딩 이런 것들만 떠올리기 십상인데, 이 작은 도시국가 주변에 그리고 도심 안에도 찬찬히 걸으면서 돌아볼 녹지들이 많다. 특히 포트 캐닝(Fort Canning) 그리고 마운트 페이버 공원(Mount Faber Park) 등은 서울의 남산처럼 가파르지 않은 언덕에 산책로가 있어서 시원하게 걷기 좋다.


그렇게 걸으면서 며칠 전 갑자기 내가 보고 싶다고 연락 온 그의 메시지가 떠올랐는데 그건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에 더 큰 파도를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건지. 그냥 무시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단호하게 연락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그냥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보고 싶어서 그것도 새벽 3시에 그렇게 잔뜩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가 와있을 줄이야. 이제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고 모든 게 귀찮다. 유부녀가 좋다는 사람이 이상한 걸 알면서도 마찰이 두려워서 말도 못 하고 숨은 채 그의 애간장만 태운다. 그냥 그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단념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그의 기억 속에 내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은 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건지. 이번에 싱가포르를 여행하면서 그의 기분과 자존심을 지켜주면서 말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모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데 필요이상의 에너지를 쏟은 것 같다.


자카르타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고, 체크인도 별 탈 없이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할 것도 없고 쇼핑은 질색이라 탑승 2시간 전에 게이트로 갔는데, 그렇게 안 오던 잠이 거기서 솔솔 올 줄이야. 오랜만의 단잠에서 깨어보니 이런 새벽 1시 15분. 망했구나 생각하며, 허둥지둥 공항 직원을 찾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이미 떠났고, 5시 30분에 항공사 직원을 만나게 해 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옛날 같았으면 잠깐의 우울감도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커서 싹 사라졌을 텐데, 솔직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순간 든 생각은 “비행기가 날 두고 가버렸구나. 나도 그냥 사라지고 싶다. “ 였다. 나만 사라지면 이 구정물 같은 감정들이 하수구로 다 빨려 들어갈 텐데,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드는 인간인 건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지 않고 정말 아무런 생각 없이 몇 분을 멍하게 그렇게 보냈다. 그것도 공항에서 노숙하면서.


정말 정신 차리자. 하루에 수십 번도 혼자 되뇌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 구정물 같은 감정을 완전히 씻어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용기를 갖고 문제에 대한 결단력과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태생은 비록 도덕의 희미한 경계선에서 안간힘을 쓰며 원칙이란 것을 지키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어찌어찌 비행기표를 다시 끊고 창이 공항에서 12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에게 정말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나를 좋아하는 마음도 한낯 불장난과도 같은 음탕한 마음이라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나보다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라고 그렇게 말해야지. 그래야 나의 우울감에도 그리고 그의 앞날에도 좋을 테니.


이제 2시간이면 자카르타로 돌아가는구나. 이곳에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 좋았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방법과 결심을 여기 싱가포르에서 내려서 그래서 이 또한 나를 성장시킨 하나의 여행으로 추억할 거라 여기면 이제 정신 차리고 게이트로 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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