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칠월의 앤 Jun 24. 2023

상처 극복이 불가능한 자들의 이야기

Fleabag

알프레드 디 수자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을 것처럼 사랑하라고 했거늘, 나는 상처를 받으면 그게 곪아서 흉터가 생길 때까지 방치하고, 또다시 다른 곳에 상처를 내는 편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힘들어서 '사랑'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오로지 나 자신만 스스로 통제, 관리, 위로가 가능하기에 이 사랑이라는 인간의 알 수 없는 감정을 남이 아닌 나에게서 찾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제파악 못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다.)  


물론, 가족을 사랑한다. 그리고 남편도 '사랑해서' 결혼했다. 하지만, 열정을 불태워서 내가 사라질 만큼 그들을 사랑하는가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예"라고 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용기 있고, 희생할만한 이타주의자가 아닌 세상 이기적인 나는 그런 사랑을 몇 번 해봤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정말 충동의 끝을 달렸을 때, 내가 내가 아니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모습이 자꾸만 튀어나와 도저히 나 자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모름지기 연애할 사람과 결혼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몸소 이해가 되었다.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지배하고 있는 와중에 영국 드라마 '플리백(Fleabag)'을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다. Fleabag은 시궁창, 헤픈 사람, 엉망진창이라는 의미인데, 이름도 알 수 없는 여자 주인공 이름이 그러하다. '플리백'.


나는 개인적으로 자학적인 블랙코미디를 좋아한다. 슬픈 상황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그 희한한 방식은 나에게 변태적인 쾌락을 선사해서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 플리백을 보는 내내 모든 에피소드가 하염없이 어이가 없어서 우스꽝스러운데,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 슬프고 애석해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사회적인 기준에서 완벽하지만 욕구불만에 싸인 언니 클레어, 뭐든 남에게 맞추면 살아가며, 본능적으로 유머 있는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좋아하지만은 않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통제하고 소유하려는 새엄마, 만인을 사랑해야 하지만 한 여인(플리백)을 본능적으로 사랑해 버린 섹시한 신부님, 아내를 사랑하지만 알코올중독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클레어의 남편,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마음속이 복잡하고 슬픔과 죄책감으로 문들어진 플리백.


30분 남짓의 에피소드들로 엮인 이 골 때린 드라마는 편집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마치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 들 정도로 박진감이 넘치는데,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그 대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그럼에도 굉장히 슬퍼서 '웃다가 울게 되는, 그래서 정신줄을 놓게 되어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플리백이 언니, 클레어와 공원 벤치에서 나누는 찰나의 대화이다.

프렌치 보브컷을 망하고 낙심한 상태의 언니를 위로하러 단숨에 공원으로 뛰어간 플리백. 그 둘은 헤어컷 악몽을 어느 정도 해소한 후 대화를 나눈다.


클레어: 어떻게 지내는지 조차 물어보지 않았네? 어떻게 지내니?

플리백: 누굴 사귀기 시작했어.

클레어: 정말? 너무 잘됐다. 뭐 하는 사람이니?

플리백: 신부님이야.

클레어: (또다시 낙담하며 머리를 감싼다. 이내) 혹시 (엄마 아빠 혼인성사 하기로 한) 그 신부님이니?

플리백: (고개를 끄덕인다.)

클레어: (미친 듯 웃기 시작하며) 이 상황 완전 엉망진창이구나. 그런데 너는 젠장할(fu*cking) 천재로구나.


무신론자인 플리백은 섹시한 신부님과의 오밤중 고해성사를 통해 심리상담자에게도 터놓지 않은 속마음, 자신의 공허함과 외로움을 고백한다. 그녀의 본모습에 사랑에 빠진 신부님은 자기도 주체할 수 없는 미친듯한 사랑의 감정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 그녀는 신부님에게 "지금 최악인 것은 내가 널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야."라고 눈물을 고백을 하지만, 신부님은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It'll pass.)라고 하며, 나 또한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그 말 한마디 남긴 채 버스정류장에서 그렇게 그 둘은 헤어지고 만다.


플리백은 체면을 신경 쓰는 가족 구성원 중 가장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이기에 그만큼 고통과 상처 속에 알게 모르게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그런 주인공이다. 사랑하는 것이 체질인데, 이 걸 하면 할수록 자신의 고통만 쌓아가기에 이상한 돌발행동을 함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감추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그녀. 나는 플리백과 클레어를 보며, 왠지 주인공 모두의 특성을 하나씩 종합한 그 세트가 '나'인 거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를 좋아하는 것 자체를 애써 부정하며, 그 누구와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고통을 극복하고 맺어온 관계들에만 집착하고 있는 나. 이런 나는 새로운 관계를 두려워하면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 집념하나로 모든 관계를 선제적으로 끊어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남에게 상처 주는 말도 서슴없이 한다. 예를 들면, "나는 세상에서 멍청한 사람들을 견딜 수 없는데, 네가 그러하다"는 둥 또는 "일만 잘하면 되지 제가 왜 (가치도 없는 너 따위 상사에게) 예의까지 갖추면 대해야 하나요?"라든지란 말들을 사무실에서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적합한 성격이 전혀 아닌데,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돈 주는 학교(회사)에 나가야 하는 이 상황이 어떨 땐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도 더 이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내 본성은 진심이 8할인 거 같아, 어떨 때는 신경이 쓰이는 그 누군가에 필요이상의 관심을 주기도 한다. 그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고,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지만, 그들에 향한 나의 사랑과 애정은 매우 진심이어서 어떨 때는 그냥 갑자기 무기력해지기 한다. 이 감정에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해 버려서 그러한 듯하다.


이렇듯 상처받은 사람들의 대환장 스토리, 플리백. 나 또한 플리백이 아닌지, 그렇게 생각해 보며, 상처를 극복하지 힘든 나 자신을 인정하며, 이 또한 지나갈 것이라는 자기 위로를 하며,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순간은 그 순간대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