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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월의 앤 Jun 23. 2023

순간은 그 순간대로

기억에 대한 소유욕

요즘 정말 생각이 없다. 아니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예정에 없이 사람들을 만나면 갑자기 숨이 멎을 듯 심장이 조여 온다. 매일같이 보는 신문 속 활자가 한 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어저께는 알파벳의 공격을 쉴 새 없이 당하는 통에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의사가 하루에 5분이라도 일광욕을 하면 멜라토닌이 생성되어 우울감도 나아지고, 잠도 잘 온다고 해서 햇볕이 나른할 때 사무실 밖을 나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통에 어지러웠고, 햇볕이고 뭐고 그냥 그 자리를 당장 뜨고 싶어 다시 달팽이가 온몸을 단단한 껍질 속에 숨기듯, 그렇게 사무실로 숨어버렸다.


정말이지 글자를 보고 쉴 새 없이 써야 하는 직업을 가진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기운이 나지 않고, 자꾸 충동적인 생각만 하는 것일까. 눈물샘은 메말라 울음도 나오지 않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고, 흥분도 되지 않고 보잘것 없는 심장에 아주 큰 바위가 들어앉은 듯,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다. 도저히 글자를 보기 힘들어서 인스타그램 들어갔는데, 대학시절 내가 살던 작은 스튜디오 아래 카페를 소개하는 릴스를 보았다. 내가 살 땐 Vava voom이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지금은 Mon Chai라는 방글라데시 음식을 파는 카페로 바뀌었다.


62A. St. Benedicts Street. 지금의 나를 만든 너무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 속의 공간. 19세기에 지어진 이 허름한 공간은 육체적으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장소였지만, 나는 이 안에서 수많은 상상을 하며, 나만의 철학과 루틴을 만들고, 내 정체성을 가꾸어나가는 온전히 집중했다. 물아일체란 이런 것인가란 희한한 생각을 하며, 나를 이 장소에 묻었고, 나는 마치 이 공간과 하나가 된 것처럼 그렇게 이 거리와 공간을 미칠 듯 사랑했다. 그리고 이 장소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초대해서 놀고, 가끔은 술병을 입에 물고 정신 줄을 놓아가면서 미친 듯 마시기도 했다. 매일 아침 7시면 과일가게 청년에게 창문 너머 수줍게 인사하며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잘 지낼까? 그때는 도대체 왜 그랬는지. 누가 날 좋아한다고 이야기 하면 숨기 바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이 서린 이 공간이 아직도 노리치에 있다니. 나는 너무 벅찬 마음에 이 소중한 공간에서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낸 친구에게 메시지를 했다. 이 공간 기억나니?라고. 그녀는 이 공간에서 나와 지냈던 시간들이 너무 그립다며,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시간들을 자기와 함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사람들의 추억 속에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란 생각과 함께 기억 속에 묻어놓았던 나의 10대 그리고 20대를 끄집어냈다. 지금은 오글거릴 정도로 로맨틱했던 시절도 있었고, 갑자기 감성적인 내가 싫어져서 갑자기 사람들과의 교류를 일방적으로 끊어내기에 급급했던 모난 시간들도 있었다. 이 모두 내가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나'임에는 틀림없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복잡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었나 보다란 생각도 든다.


의사는 나에게 그랬다. "당신은 원래부터 불안한 사람인데, 불안 장애가 발현될 때는 더 이상 참지 못해서 분출하고 맙니다. 그리고 10대 그리고 20대 중반까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만 쏟은 그 시간에 집착하며, 사람들과의 교류를 단절한 채 외로움을 고독으로 여기며, 사람들로 부터 해방(liberation)한 자신을 사람 속에 더 이상 구속시키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나는 사람들이라는 스트레스를 마주하기 두려워 냅다 도망친채 내 속에 숨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문을 꽁꽁 닫은 채 기억 속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에 집착하고 있어서 지금 사는 게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다. 무기력함원인은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미래에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그러다가 문득 기억 그리고 추억을 그대로 놔두었다면 아름다웠을 영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인 '비포 3부작'이 그러한데, 비엔나에서의 하루를 보낸 제시와 셀린은 약 10년 후 파리에서 재회한다. 제시는 셀린과의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파리에 왔고, 셀린과 재회한다. 여기까지가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또 다시 10년 후 비포 미드나잇에서 제시와 셀린은 가정을 이루었지만,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속박하는 사이가 돼버리고 만다. 그 안에서도 아름다움은 있겠지만, 의무가 전제된 관계란 아름다운 추억을 논하기엔 너무 모순이 아닌가?


그렇게 기억 속에 머물 때 아름다운 관계가 있듯 과거의 나도 기억 속에 머물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너무 힘겨운 지금, 나아가자는 압박감을 떨치고 기억과 추억이라는 나만의 진정제를 한 움큼 집어삼킨 채 기억에 집착하지 말고 그대로 놔두자고 다짐했다. 기억을 소유하지 말자고, 뭐든지 통제하려는 이 이상한 욕심을 버리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기억이란 기억하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진리를 되뇌며, 그렇게 힘겨운 한 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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