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대화

교회 없는 신앙의 일상적 실천 방법

by Francis Lee

3부. 교회 없는 신앙의 일상적 실천 방법


이 3부는 ‘잘하는 신앙’을 제안하지 않는다. 대신 ‘지속 가능한 신앙’을 실천한다. 제시된 실천을 모두 따를 필요도, 완벽하게 할 필요도 없다. 실패해도 괜찮고, 멈췄다 다시 시작해도 괜찮다. 이 3부는 훈련의 강도가 아니라 리듬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다.

7장. 기도: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도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난 뒤 가장 먼저 멈추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기도다. 성경 읽기는 간헐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예수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더 깊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도는 어느 순간 완전히 막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굳이 말을 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든다. 예전처럼 기도하려 하면 오히려 불편함과 위화감이 앞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를 못 하겠어요.” 그러나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도를 못 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전 방식의 기도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교회가 가르쳐 온 기도는 대체로 말의 기술이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말해야 하는지, 무엇은 말해도 되고 무엇은 말하면 안 되는지가 이미 법률처럼 정해져 있었다. 교파를 초월해서 이는 거의 유사하다. 감사로 시작하고, 회개를 거쳐, 간구로 나아가며, 마지막에는 신의 뜻에 맡긴다는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 형식은 오랫동안 신자들을 훈련시켜 왔다. 그런데 이 방식은 기도를 점점 피로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아무리 기도해도 간청이 들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좌절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 이렇게 말이 막히는 순간, 응답이 없는 기도는 신앙의 실패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기도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장황한 말을 경계했고,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응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예수에게 기도는 설득의 언어가 아니라 머무름의 태도에 가까웠다. 혼자 산에 올라가 침묵했고, 새벽에 아무 말 없이 시간을 보냈으며, 위기의 순간에도 길고 논리적인 설명 대신 짧은 신뢰의 말만 남겼다. 인간 예수의 기도는 언제나 말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두는 행위였다.


그래서 탈교회 이후의 기도는 새롭게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버려야 할 말들에서 시작된다. 이 장에서 제안하는 기도는 더 잘 말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도다. 신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설득하려는 시도를 멈추고, 그 앞에 있는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 연습이다.

첫 번째 실천은 하루 3분 정도의 침묵이다. 길지 않아야 한다. 10분, 20분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 가능성이다. 하루 중 아무 때나, 가능하면 같은 시간에, 타이머를 3분 정도로 맞추고 앉거나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선언도 필요 없다. 눈을 감아도 되고, 뜨고 있어도 된다. 떠오르는 생각을 몰아내려 하지 말고,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 든 채로 그냥 있는다. 이 침묵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에 머무는 연습이다. 많은 이들이 이 3분을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그 불편함이 지금까지의 기도가 얼마나 ‘해야 할 말’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두 번째 실천은 요청하지 않는 기도다. 우리는 기도를 필요와 결핍의 언어로 배워왔다. 그러나 그 언어는 쉽게 거래의 구조로 변한다. “이것을 주시면,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조건이 달린 기도이다. 요청하지 않는 기도는 이 구조를 의도적으로 중단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건강을 달라고도,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도, 누군가를 바꿔 달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해본다. “나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것은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 상황을 통제하려는 충동을 잠시 내려놓는 선택이다. 요청하지 않는 기도는, 신이 침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허락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내가 모든 것을 말로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원적인 본질적 자유를 회복하는 기도다.


세 번째 실천은 감사와 반성도 하지 않는 기도다. 어쩌면 이 제안은 많은 이들에게 가장 불편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감사하지 않으면 불신앙이고, 반성하지 않으면 교만하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감사와 반성조차 ‘의무’가 되는 순간, 기도는 다시 일종의 ‘수행 평가’가 된다. 오늘 하루만큼은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정리하지 않는다. 평가를 멈추는 기도다. 그냥 하루를 살았다는 사실만을 인정한다. 기도는 삶을 정리하는 보고서가 아니라, 삶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두는 자리일 수 있다. 감사와 반성은 다시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항상 기도의 입장권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 없는 새로운 기도는 즉각적인 위안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더 큰 공허감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공허함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말로 신을 움직이려는 시도가 멈춘 자리일 수 있다. 기도가 더 이상 요청과 설명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신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침묵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알고 계시는 분 앞에서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신뢰의 공간이다.

기도를 절대자와의 대화로 이해한다면, 그 대화는 언제나 인간이 주도하는 말의 교환이 아니어야 한다. 신과의 대화에는 언어가 굳이 필요 없다. 기도의 깊은 차원에서 신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으며, 대화의 흐름 역시 우리가 통제하지 않는다. 이 새로운 기도에서 우리는 말을 통해 신을 설득하지도, 고백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침묵 속에서의 기도는 바로 이 전제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이미 말해질 필요가 없는 상태로 있는 그대로 신 앞에 머무는 것이 이 기도의 핵심이 된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난 뒤에도 예수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삶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말이 막히는 자리, 설명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에도 함께 머물러주는 인물로 기억된다. 십자가 앞에서도, 배신과 침묵 속에서도, 예수는 모든 상황을 말로 해명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도는 바로 이 예수의 태도에 가장 가까운 기도다. 신 앞에서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은, 버려졌다는 감각이 아니라 이미 깊이 이해받고 있다는 신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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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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