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을 위하여
15장. 직분·관계·책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
― 신앙보다 먼저 소진되는 사람들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사람들은 대개 가장 성실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게으르지 않았고, 무책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었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대신 떠안았으며, 공동체의 필요를 자신의 일정과 감정보다 앞세웠다. 직분을 맡았고, 관계를 책임졌고, 교회의 운영과 유지에 실질적으로 기여해 온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문제는 이 성실함이 어느 순간 자기 소진으로 바뀐다는 데 있다. 신앙은 깊어지기보다 메말라가고, 봉사는 기쁨이 아니라 의무가 되며, 헌신은 선택이 아니라 탈출구 없는 구조가 된다.
특히 마음은 이미 교회의 방향과 언어에 동의하지 않지만, 역할은 계속 요구될 때 사람은 내적으로 분열된다. 한쪽에서는 ‘그래도 내가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제는 더 이상 진실할 수 없다’는 양심의 신호가 충돌한다. 이 분열은 개인의 신앙이 약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개인의 내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구조적 긴장이다. 그럼에도 교회는 종종 이 긴장을 개인의 영적 상태나 헌신 부족으로 환원한다. 그 결과, 소진은 죄책감으로 덧씌워지고, 쉼은 배신처럼 느껴진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지금 신앙을 지키고 있는가? 아니면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직분이 지닌 가치를 모두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직분과 신앙을 동일시해 온 오래된 혼동을 해체하기 위한 것이다. 직분은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 기능일 뿐이다. 그것은 공동체 운영을 위해 필요하지만, 결코 그 자체로 영적 우월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기능은 조정될 수 있고, 내려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기능이 더 이상 자신의 양심과 삶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때, 조정은 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무비판적인 관성적 지속이 신앙을 훼손할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키는 첫 번째 방식은 모든 요구에 즉각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늘 ‘지금’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사람이 필요하고, 지금 헌금이 필요하고, 지금 헌신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압박한다. 그러나 인간은 늘 ‘지금’ 응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쉼 없이 즉각 반응하는 구조는 결국 개인을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응답을 늦추는 것은 무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점검할 시간을 확보하는 행위다. “생각해 보겠다.”, “지금은 어렵다.”라는 말은 신앙의 실패가 아니라 자기 인식의 솔직한 표현이다.
두 번째 방식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는 용기다. 교회 안에서는 종종 침묵이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의견을 내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거나, 반대로 영적 무관심으로 오해받는다. 그러나 모든 모임에서 입장을 밝혀야 할 의무는 없다. 특히 자신의 말이 즉각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관계의 소모만 초래할 때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중요한 선택이다. 침묵은 동조가 아니라 거리 두기의 한 형태일 수 있으며, 자신의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관계의 재배치다. 교회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통해 관계의 밀도를 극대화한다. 곧 교회 신자가 예수 이름으로 한 가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같은 깊이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직분 관계, 사역 관계, 개인적 우정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모든 요청에 정서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기대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관계는 지속 가능해진다. 관계를 줄인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기대를 조정하는 일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책임의 범위를 다시 그리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주어진 ‘책임’은 쉽게 무한대로 확장된다. 누군가 힘들면 나의 책임이 되고, 일이 잘못되면 나의 부족함이 이유가 된다. 그러나 책임에는 경계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개인의 헌신으로만 해결하려는 구조는 전혀 건강하지 않다. 자신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식별하고, 그 너머를 내려놓는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성숙이다.
그런데 교회 안의 많은 이는 이 지점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내가 빠지면 누가 할까?’, ‘이 정도도 못 하면 믿음이 없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이 역할을 유지하는 것이 나와 타인을 살리는가? 아니면 단지 제도 교회의 구조를 연명시키는가?” 신앙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은 생명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 장이 말하는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은 결코 이기적인 자기 보호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 완전히 소진되기 전에 자신을 회수하는 기술이다. 직분과 관계, 책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채 남아 있는 것은 진실된 충성이 아니라 그저 관성적인 소진이다. 때로는 ‘한 발 뒤로 물러남’으로써만 신앙의 중심을 다시 붙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내려놓음이 곧 배교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분을 조정하고, 관계의 밀도를 낮추고, 책임의 범위를 제한하는 행위는 신앙의 후퇴가 아니라 재정렬이다. 신앙보다 먼저 소진되어 버리고 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헌신이 아니라, 더 정확한 식별이다. 이 장은 그 식별을 위한 최소한의 언어를 제공하고자 한다.
� <이 장을 읽고 오늘 할 수 있는 한 가지>
이번 주에 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역할 하나를 떠올리고, “이 역할이 지금의 나를 살리는가? 아니면 소진시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솔직하게 적어본다.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다.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방향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