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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무엇을 하는가?

교회 밖에서 살아 있는 영성

by Francis Lee

18장. 성령은 무엇을 하는가?


— 위로, 분별, 불편함이라는 가장 일상적인 작동 방식


17장에서 우리는 성령이 교회라는 제도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성령은 교회가 허락한 방식으로만 ‘임하는 힘’이 아니며, 특정 장소나 분위기, 승인된 체험을 통해서만 확인되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교회를 벗어난 자리에서, 또는 교회에 매이지 않은 삶의 한복판에서 성령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사실 많은 신자는 이 질문 앞에서 막막함을 느낀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의 작동이 비교적 단순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뜨거워지면 성령, 눈물이 나면 성령, 공동체가 하나 되는 느낌이 들면 성령인 식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성령을 지나치게 감정의 강도나 집단적 분위기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에 나가면서 뭔가 깊은 감동을 느낄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 잘해서 감동을 주는 목사나 감동의 물결을 불러일으키는 전도사가 인기를 누린다. 그 결과 교회를 떠난 신자는 흔히 이렇게 말하게 된다.


“요즘은 성령을 잘 느끼지 못하겠다.”


그러나 성령은 애초에 ‘느껴짐’의 문제로 정의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감각의 대상이기보다, 삶의 방향을 조용히 조정하는 힘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작동은 대체로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어서 쉽게 놓쳐버리기 쉽다. 성령은 주로 세 가지 방식으로 삶에 개입한다.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고, 분별하게 만들고,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불편하게 만든다.


먼저 성령은 인간을 위로한다. 다만 인간의 일시적 감정을 달래기보다는 존재 자체를 지탱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성령의 위로는 흔히 생각하는 감정적 안정과 다르다. 그것은 즉각적인 문제 해결이나 기분 전환이 아니다. 성령의 위로는 상황을 즉시 바꾸어 주는 힘이 아니다.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거나 고통을 없애 주는 능력도 아니다. 오히려 성령의 위로는, 사람이 지금 처한 상황이 그대로인 채로 남아 있을 때에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힘에 가깝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다른 곳으로 옮겨 주기보다,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도록 버티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성령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종종 이렇게 느낀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마음이 편안해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를 살아낼 힘은 남아 있다는 느낌이다. 도망치고 싶은 상황에서 당장 빠져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지도 않게 되는 상태. 성령의 위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 이 위로는 고통을 미화하지도 않고, ‘괜찮다.’라고 섣불리 말하지도 않는다. 그 대신 성령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이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더라도, 너는 여기서 사라질 필요는 없다.”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그 안에 머물 수 있게 하는 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참아내라는 강요가 아니라 떠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몸을 지탱해 주는 힘, 그것이 성령의 위로다. 그래서 성령의 위로는 눈물이나 감정의 해소로만 확인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를 마치고 나서 ‘그래도 나는 오늘을 넘겼다.’라는 고백으로 드러난다. 아무 변화도 없는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다음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이 지속의 힘이야말로, 성령이 가장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깊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의 위로도 바로 그러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하게 되지 않았고, 오해를 면제받지도 않았으며, 실패하지 않게 보호받지도 않았다. 대신 성령은 그들이 도망치지 않고 자기 삶의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붙잡아 주었다.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 성령의 위로 역시 비슷하게 작동한다. 불안이 사라지지 않아도, 답이 정리되지 않아도, 신앙이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견디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 위로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보다, ‘지금 이 상태로도 버티며 살아 있어도 된다.’라는 허락에 가깝다.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힘, 그것이 성령의 첫 번째 작동 방식이다.


다음으로 성령은 분별하게 한다. 더 많은 확신이 아니라 더 정직한 질문으로 분별에 이끈다. 성령은 사람에게 결코 정답을 빨리 주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은 질문을 오래 붙들게 만든다. 무엇이 옳은지보다,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지를 스스로 분별하게 만든다. 그래서 성령의 작동은 종종 혼란처럼 느껴진다. 이전에 분명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갑자기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흔들림은 신앙의 붕괴가 아니라, 분별의 시작이다. 성령은 신자를 더 확신에 찬 사람으로 만들기보다, 더 정직한 사람으로 만든다. 그래서 성령이 작동하면 사람은 종종 이렇게 느낀다.


“이제는 예전처럼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망설임과 침묵은 성령의 부재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개입이다. 성령은 사람을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자신이 왜 그것을 믿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만든다. 교회가 제공하던 ‘편리한’ 준비된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성령은 대신 분별이라는 느린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동안 안주해 온 안정을 깨는 가장 신실한 방식으로 말이다. 많은 사람이 성령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순간은 사실 성령이 가장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불편함이 시작될 때다. 이전에는 문제없어 보였던 말과 행동, 구조와 관행이 갑자기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신앙이라고 불렸던 것들이 이제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불편함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은 다시 익숙한 과거의 질서로 돌아가도록 몰아붙이지만, 성령이 주는 불편함은 그렇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든다. 한 번 보아버린 것을 다시 못 본 척할 수 없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성령의 불편함이다. 그래서 성령은 사람을 결코 더 편안한 신앙으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더 책임 있는 삶으로 밀어낸다.


이 불편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성령을 오해한다. “성령이 함께한다면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까?” 그러나 성경 속 성령은 언제나 기존의 안락함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예외 없이 그렇다. 이런 불편한 성령은 특별한 순간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확인된다. 결국 성령은 드라마틱한 체험보다, 삶의 방향성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감동이 사라져도 여전히 정직하려 애쓰는 선택, 확신이 없어도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 용서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폭력을 멈추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들 속에서 성령은 작동한다.


그래서 성령을 묻는 질문은 ‘요즘 성령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요즘 나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이어야 한다. 성령은 교회를 떠난 사람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다만 이제 성령은 교회의 통제 아래 관리되지 않는 방식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언어로, 그러나 분명히 삶을 움직이는 방향성으로 나타날 뿐이다. 위로하고, 분별하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 가장 일상적인 작동 방식 속에서 성령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


� <실천 연습>


오늘 하루, “지금 내가 한 이 선택이 나를 더 정직하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세 번 던져본다.

그 질문이 당신을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그 불편함을 성령의 흔적으로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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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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