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값 포퓰리즘과 헌법 질서의 파괴를 경계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다주택자를 주택 가격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일 가구 일 주택이 옳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표면적 의도는 분명하다. 투기 수요를 억제하고 주택 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의도가 아니라 방식이다. 당연히 여러 가지 반문이 제기된다.
'이 발언과 그에 뒤따르는 정책 방향은 과연 헌법의 테두리 안에 있는가?'
'국가는 개인에게 '집을 팔라'라고 거의 강압적인 말을 할 권한이 있는가?'
'그런 요구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의 문제다. 이재명 대통령도 자기의 의견을 얼마든 제기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국민도 자기 의견을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다주택자도 엄연한 국민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악마'로 몰리고 있다. 이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여기서는 감정이 아니라 법으로 따지고 싶다.
무엇보다도 먼저 대통령이 국민에게 집을 팔라고 요구할 권한은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23조는 재산권을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다. 물론 재산권은 제한 없는 권리가 아니다. 그래서 헌법도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이 조항은 재산권의 무제한 사용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말하는 것이지, 재산권의 보유 자체를 부정하는 위임장은 아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나라의 전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개인의 재산을 처분하라고 강요할 권한은 없다. 그 강요가 명령의 형식이든, 세금과 규제의 압박이든 마찬가지다. 헌법이 허용하는 것은 행위의 규제이지, 존재 상태의 처벌이 아니다. 투기 행위를 규제할 수는 있어도, 다주택 상태 자체를 죄악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이재명 대통령의 언행과 정책을 옹호하는 자들은 '아무도 법으로 집을 팔라고 명령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단 기준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헌재는 이미 여러 판례에서 반복해서 과도한 간접 강제는 직접 강제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해 왔다. 현재 다주택자에게 누적되는 중과세, 대출 봉쇄, 거래 제한에 더해 지금처럼 사회적 낙인이 결합되면 다주택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실상 '집을 팔거나 아니면 보유에 따른 손해를 감당하라. 선택은 전적으로 네게 달려 있다.'라는 식의 비아냥으로 수렴된다. 이것이 과연 자유로운 선택인가? 궁지에 몰아넣고 강요하는 실질적으로 선택지가 하나뿐인 자유는 헌법이 말하는 자유가 아니다.
재산권 침해 문제는 단순한 정책 논쟁이 아니다. 헌법이 금지하는 ‘기본권의 본질적 침해’에 해당하느냐의 문제다. 헌법재판소가 재산권 제한을 심사할 때 가장 엄격하게 들여다보는 기준도 그 제한이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했는지 여부다. 재산권은 단순히 ‘보유’의 권리가 아니다. 사용, 수익, 처분의 자유가 결합된 종합적 기본권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제시한 ‘팔든지 당하든지’ 식 정책 방향은 이 가운데 핵심인 ‘처분의 자유’를 사실상 박탈한다. 보유를 유지할 때 감당하기 어려운 불이익을 누적시키고, 매각만이 유일한 합리적 선택이 되도록 설계한다면, 이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사정이 어떻든, 의사와 무관하게 팔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는 구조적 강제다. 이는 재산권에 가해질 수 있는 ‘선의의 사회적 제약’의 한계를 분명히 넘어선다. 정책의 목적이 공익이라는 주장만으로 이 침해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법률에 근거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헌법은 ‘의도’를 묻지 않는다. 헌법은 ‘비례성’을 묻는다. 수단이 목적에 비해 과도한지, 덜 침해적인 대안은 없는지, 그리고 그 결과 기본권의 본질이 훼손되는지 여부를 묻는다. 보유를 범죄화하고 처분을 강제하는 방식은, 재산권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해체하는 접근에 가깝다. 주택 정책이 사회적 형평을 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이 기본권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이라는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헌법이 허용하지 않는 정책은, 여론의 박수 속에서도 결국 위헌이라는 벽에 부딪히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그렇게 증명돼 왔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주택자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라, 정치적 타도의 대상으로 처벌되어야 할 '악마'로 불리는 도덕적 적으로 설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위정자들의 정책 실패를 가리기 위해 희생양을 만드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언어다. 다주택자를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낙인찍는 순간, 주택 정책은 시장을 다루는 정책이 아니라 분노를 관리하는 정치로 변질된다. 집을 놓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양분하여 국민끼리 문자 그대로 치고받게 만들고 정작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가와 관리는 슬쩍 뒤로 빠진다. 더구나 그들 권력자 대부분은 이미 주택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곳에 피난해 있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주택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정치가와 관리가 책임져야 하는 구조와 제도가 아니라 ‘악마’인 국민 개인이 되고, 어처구니없게도 이 문제 해결의 책임의 주체인 정부는 해결자가 아니라 심판관의 자리에 선다. 사실 이런 방식은 포퓰리즘 정치가 늘 선택해 온 가장 위험한 경로다. 복잡한 경제 문제를 단순한 선악의 도덕 구도로 환원하고, 다수의 불만을 특정 소수에게 집중시켜 정치적 지지를 결집하는 방식이다. 6월 지방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 이런 단순한 선악의 도덕 구도가 얼마나 매력적일 것인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실제 통계를 들여다보면, 다주택자를 집값 폭등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정부의 서사는 처음부터 성립하기 어렵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주택 소유율은 약 60% 수준이고, 그 가운데 1주택자는 전체 주택 소유자의 약 85%에 달한다. 반면 2주택 이상 보유자는 약 15%에 불과하며, 3주택 이상 보유자는 모두 합쳐도 극소수다. 전체 인구 기준으로 보면 다주택자는 약 10% 남짓에 그친다. 정부가 지금 ‘투기 세력’이라 부르며 정면으로 겨누는 대상이 실은 국민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되는 소수라는 뜻이다. 지역별로 봐도 상황은 정부의 단순한 도식과 거리가 멀다. 다주택자 비율은 제주와 일부 지방에서 상대적으로 높고, 정작 집값 상승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서울·수도권의 다주택 비율은 14% 안팎에 그친다. 집값이 비싼 지역일수록 이른바 ‘똘똘한 한 채’ 보유가 많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다주택자 매물 출회가 곧바로 주택 가격 안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설령 다주택자들이 보유 주택을 모두 시장에 내놓는다 해도, 그 물량이 무주택자의 주거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주택자가 보유한 주택 가운데 상당수는 입지나 가격 면에서 실수요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정부 스스로 강력한 대출 규제를 병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주택자의 구매 여력은 더욱 제한돼 있다. 매물이 늘어도 살 수 없는 집이 대부분이라면, 시장 안정이라는 정책 목표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다주택자라는 범주 안에는 상속으로 주택을 보유하게 된 사람도 있고, 노후 대비를 위해 장기 임대를 선택한 사람도 있으며, 지역, 직업, 시장 여건상 불가피하게 여러 주택을 보유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을 단순히 하나의 ‘악마적 탐욕 집단’으로 묶어 비난하고 주택 처분을 강요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라 선동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정책 실패를 가리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집값 안정이라는 실질적 목표에는 거의 이바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택 가격 상승은 공급, 금리, 유동성, 인구 이동, 수도권 집중, 정책 불확실성 등 복합적 요인의 결과다. 그럼에도 정부는 이 복잡한 문제를 ‘악마 같은 다주택자 대 선량한 국민’이라는 단순한 도덕 구도로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포퓰리즘의 언어다.
또한 이는 평등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개인의 소유 경위와 목적, 책임의 차이를 모두 지운 채 숫자 하나로 선악을 재단하는 국가는 법치국가라기보다 도덕 재판소에 가깝다. 포퓰리즘은 늘 ‘국민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늘 국민을 다시 ‘좋은 국민’과 ‘나쁜 국민’으로 나눈다. 그 순간 시민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와 교정의 대상이 된다. 헌법은 국가에 시장을 조정할 권한은 부여했지만,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해 응징할 권한까지 위임하지는 않았다. 정책 언어가 합리의 언어를 버리고 도덕적 적대의 언어를 선택하는 순간, 그 피해는 결국 모든 국민에게 돌아간다. 오늘은 다주택자일지 모르지만, 내일은 또 다른 집단이 ‘공공의 적’으로 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의 발언 자체를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다. 헌법소원은 구체적 법률이나 행정처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발언을 토대로 제정되고 집행된 법률, 세금, 규제는 충분히 헌법적 심사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부동산 세제와 관련된 여러 사안에서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일부는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판단을 받았다. 쟁점은 늘 같았다. 공익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 집단에 과도한 희생을 강요했는가였다.
다시 말하지만, 주택 가격 상승은 구조의 문제다. 위에서 말한 공급, 금리, 유동성, 인구 이동, 수도권 집중, 정책 불확실성에 더한 세대 불균형의 결과다. 이 구조를 바로잡지 못했을 때 가장 쉬운 선택은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치 국가는 그런 유혹을 경계하기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투기를 규제할 수 있다. 그러나 소유를 죄로 만들 수는 없다. 국가는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삶의 방식에 도덕적 판결을 할 수는 없다. 이 경계선을 넘는 순간, 우리는 부동산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헌법 감각의 붕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재명 대통령은 아예 국민에게 '집을 팔고 주식으로 가라'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순간, 국가는 이미 위험한 선을 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주식시장이 5천 포인트를 넘어선 것을 커다란 경제적 성과처럼 자랑하며, 부동산 보유보다 금융자산 투자를 택하라고 노골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경제 정책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개인의 자산 선택에 개입하는 유혹적 통치에 가깝다.
주식시장 5천 포인트는 숫자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과연 그 숫자가 누구의 주머니를 두텁게 만들었는가이다. 코스피가 아무리 상승해도, 그 과실이 공평하게 분배된 적은 없다. 삼성전자 주식을 몇백 주, 많아야 몇천 주 가진 서민과, 수십만 주, 더 나아가 수백만 주를 보유한 재벌의 수익은 구조적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주가가 10% 오를 때, 서민은 몇백만 원을 벌고, 재벌은 수백억, 수천억 원을 번다. 수익률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자산 격차는 그 상승 국면에서 오히려 극단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게다가 서민을 문자 그대로 '영끌' 해서 모은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하다가 실패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된다. 그런 상황에 부닥친 서민을 정치가가 책임질 수 있는가? 재벌들은 주식 투자에 실패해도 여유 자금으로 극복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거의 무한하다. 그런 재벌과 서민이 같이 참여하는 주식시장은 이미 처음부터 기울어진 언덕일 뿐이다. 더구나 재벌들은 서민과 비교하면 훨씬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 주식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정의롭지 못한 시장에 참가해서 실패한 서민은 그 책임을 오로지 자신이 져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마치 주식시장이 서민의 새로운 경제적 상승의 사다리인 것처럼 말한다. 이는 지나치게 무책임한 메시지다. 주식은 주거와 다르다. 집은 사는 곳이지만, 주식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위험 자산이다. 국가가 '집을 팔고 주식을 사라.'라고 말하는 순간, 이는 단순한 정책 방향 제시가 아니라 국민의 생존 기반을 위험 자산으로 이동시키라는 권고가 된다. 더 큰 문제는 국가가 주식 투자에 따르는 위험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이 오를 때는 정부가 성과를 말하지만, 폭락할 때 그 손실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이다. 주거 안정은 헌법적 가치이지만, 주식 투자 실패는 앞에서 말한 대로 철저히 개인의 선택으로 남는다. 이런 구조에서 정부가 특정 자산 선택을 유도하는 것은 이익은 정치가가, 위험은 국민이 떠안는 비대칭 구조를 만든다.
역사적으로도 국가가 금융자산 투자를 애국이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독려한 사례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일본의 버블 붕괴,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모두 '이번엔 다르다!'라는 정치가와 관료들의 낙관적인 발언에서 출발했다. 주식시장은 언제나 오를 수 있다는 신화를 국가가 앞장서 퍼뜨릴수록, 그 붕괴의 충격은 더 크고 잔인해진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 같은 발언이 부동산 정책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집값을 안정시키지 못했으니 집을 갖지 말고, 주거 불안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금융시장으로 가라는 논리는, 국가의 책무를 회피하는 너무나 무책임한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국가는 시장을 관리할 수는 있어도, 국민의 삶을 걸고 '베팅'해서는 안 된다. 집을 팔고 주식으로 가라는 메시지는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세금, 규제, 윤리도덕 담론을 총동원한 은밀한 유혹이다. 이는 자유시장도 아니고, 복지도 아니다. 그 중간에서 책임만 빠진 매우 위험한 통치 방식이다.
대통령이 자랑해야 할 것은 주가지수가 아니라, 서민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주택 시장 안정성이다. 주식시장은 개인의 선택이어야지, 국가가 방향을 정해줄 대상이 아니다. 국가는 국민에게 투자자가 되라고 설득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투자하지 않아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집 팔고 주식에 투자하라'는 유혹이 아니라, 국가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에 대한 냉정한 성찰이다. 숫자는 오를 수 있지만,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회복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