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가 윤석열이 일으킨 혼란을 수습하려면?
CNN에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주제로 한 기사가 올라왔다.(참조: https://edition.cnn.com/2026/02/02/china/china-us-europe-allies-analysis-hnk-intl ) 이 글을 읽어보니 한국이 해야 할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CNN 기사 내용을 되새겨 보면서 이재명 정부가 나갈 길을 윤석열 정부와 비교해 이야기해 본다.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 이후 미국 외교는 다시 한번 동맹국들에게 불안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린란드 영유권 발언, 캐나다와의 관세 전쟁, NATO에 대한 공개적 경멸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전후 미국이 구축해 온 동맹 질서 자체를 흔드는 신호다. 이 균열의 틈을 가장 빠르게 읽은 국가는 중국이다. 최근 시진핑 주석이 맞이한 서방 지도자들의 ‘연쇄 방중’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 캐나다, 프랑스, 핀란드, 독일까지 모두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이지만 이제 중국과의 관계 재설정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이 이러한 상황을 ‘새로운 세계질서의 징후’로 해석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미국이 더 이상 안정적 중심축이 아니게 된 세계에서, 중국은 자신을 대안적 중심으로 포지셔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서방의 공식 담론은 명확했다. 중국은 규칙 기반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 체제적 경쟁자, 안보 위협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등장 오래전부터 현실은 이 담론을 지속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 중국은 이미 세계 최대의 상품 제조국이며, 핵심 공급망의 중심이고, 희토류, 배터리, 전기차, 태양광 등 미래 산업의 관문을 쥐고 있다. 서방 지도자들의 최근 행보는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한 결과다. 유럽연합은 중국산 전기차 관세를 ‘최저 가격제’로 대체했고, 캐나다는 농산물 수출을 위해 대중 관세를 완화했다. 영국은 안보 논란을 감수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강조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국에 대한 신뢰 회복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신뢰 약화의 반사 효과에 가깝다.
그러나 여전히 분명한 사실은 유럽이 중국을 이상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권 문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중국 역할, 기술 탈취, 무역 불균형에 대한 우려는 여전히 살아 있다. 또한 유럽연합은 화웨이와 같은 이른바 ‘고위험 공급자’ 배제 조치를 취하고 중국을 겨냥해서 외국인 투자 심사를 강화했으며 희토류와 같은 핵심 광물 공급선과 관련하여 탈 중국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유럽의 전략은 단순한 ‘친중’이 아니라 ‘미국의 일극 체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택하는 선택이 아니라, 둘 모두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힘든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새로운 시대의 이러한 변화된 흐름을 자신들의 가치 승리로 포장한다. 관영 매체와 학자들이 자신 있게 서방이 선택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중국이 그리는 세계 질서는 무엇보다 이념보다 이익을 중시한다. 그래서 단순한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구분을 거부하고, 경제와 안보에 관련된 실익을 기준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동맹 없는 다극 질서를 추구한다. 그래서 NATO 식 집단 방위나 가치 동맹이 아닌, 느슨한 파트너십의 네트워크 형성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이 그동안 내세운 인권, 자유, 법치라는 보편 가치의 해석권을 미국이 독점적으로 쥐고 있지 않는 세계를 추구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이 질서가 미국과 중국과 같은 패권국 이외의 나라들에 반드시 유리한가라는 점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한국은 유럽보다 훨씬 어려운 위치에 있다. 안보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경제는 중국과 깊이 얽혀 있는 데다가 기술은 미-중 갈등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또한 지정학적으로는 북한이라는 최악의 상수가 상존해 있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 담론은 여전히 ‘한미동맹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대전제문장에 갇혀 있다. 그런데 이는 오랫동안 유효했지만, 지금은 유연하고 창조적인 사유를 중단시키는 일종의 주문이 되고 있다.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드러낸 신제국주의적 미국이 등장한 세계에서 ‘미국은 항상 옳다’라는 전제 위에 외교를 설계하는 것은 현실주의가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것에 가깝다.
유럽이 중국과 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군사적 자율성과 다자 외교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은 주한미군, 핵확장억제, 미국 통제에 따르는 미사일 방어 체제, 대북 억지의 첨병 역할과 같은 모든 핵심 안보 요소에서 미국에 연결돼 있다. 이 구조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이미 한국 경제의 핵심 축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현재 상황에서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국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외교는 점점 불가능한 과제가 되고 있다.
한국 정치에서 외교는 종종 도덕화된다. 미국은 자유 진영이고 중국은 권위주의적 독재 진영이라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도식은 이해하기 쉽지만, 정책으로는 위험하다. 외교를 도덕 선택으로 환원하는 순간, 협상과 조정의 공간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유럽은 중국의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협력한다. 한국은 중국을 비판하면 관계 단절을, 협력하면 가치 포기를 의심받는다. 이 이분법은 외교를 정치적 충성 경쟁으로 전락시킨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 정치가 트럼프 이후의 세계를 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다음과 같은 변수를 가정하고 움직이고 있다. 곧 미국이 언제든 동맹 비용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NATO조차 조건부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보호가 영구적이지 않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유럽식 거리 두기’이다. 한국이 중국으로 기울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되, 자동 복종을 경계하고 중국과의 협력은 확대하되, 전략적 의존을 관리하며 다자 외교와 중견국 연대를 실질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줄타기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중국은 새로운 세계질서를 말하고, 미국은 옛 질서를 되찾으려 한다. 그러나 한국은 어느 쪽의 구호에도 쉽게 몸을 실을 수 없는 나라다. 지금 한국 외교에 필요한 것은 “누구 편인가”를 외치는 용기가 아니라, “언제, 어디까지, 왜 함께 가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선택을 강요받는 시대일수록, 선택을 늦추고 조건을 따지는 국가가 살아남는다. 그 준비를 지금 시작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계질서에서는 선택권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선택의 문제가 한국에 특히 어려운 것은 윤석열 정부가 한국의 외교 노선을 근본적으로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를 옹호하는 이들이 가장 자주 꺼내는 말은 ‘원칙’이다. 자유, 인권, 법치라는 보편 가치를 외교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질문을 바꿔보자. 원칙을 말한 외교가 왜 국익을 지키지 못했는가? 왜 그 원칙은 늘 한국에게만 비용을 요구했는가? 윤석열 외교의 문제는 가치 자체가 아니라, 가치를 외교 판단을 멈추는 알리바이로 사용했다는 데 있다. 국제정치는 선악의 대결장이 아니다. 이해관계의 조정장이다. 이 기본을 무시한 순간, 외교는 도덕 연설로 전락한다.
윤석열 정부는 한미동맹을 강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강화와 종속은 다르다. 강화란 상호 조율과 협상 능력이 커지는 것이고, 종속이란 상대의 판단을 자신의 판단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윤석열 외교는 후자에 가까웠다. 미국의 대중국 전략에 대해 한국은 질문하지 않았고, 조정하지 않았으며, 예외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반도체, 배터리, 공급망 문제에서 한국 기업이 떠안은 비용은 ‘동맹의 대가’라는 말로 얼버무려졌다. 외교가 국익을 설명하지 못하면, 그 외교는 실패다. 윤석열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악화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정말 불가피했는가? 독일, 프랑스, 캐나다, 영국은 미국의 동맹이면서도 중국과의 대화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교를 한다. 윤석열 외교는 불편한 상대와 외교를 수행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외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술을 버린 것이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북핵 문제에서 중국의 역할을 활용할 카드도 사라졌고, 러시아와의 관계 단절은 에너지와 안보 리스크를 키웠다.
윤석열 외교의 위선은 일본 문제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강제동원 제삼자 변제 안은 ‘미래’를 말했지만, 그 미래에는 정의도, 피해자도 없었다. 일본에는 질문하지 않으면서 중국에는 도덕을 요구하는 외교를 과연 원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윤석열 외교는 강했다기보다 편향적이었고, 당당했다기보다 선택을 회피한 외교였다.
이러한 윤석열 정부가 벌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등장한 이재명 정부 외교를 비판하는 이들은 빠지지 않고 ‘친중’이라는 단어를 꺼낸다. 그러나 이 질문부터 다시 해야 한다. 중국과 외교를 하면 친중인가? 그렇다면 독일과 프랑스, 최근 중국을 찾은 캐나다와 영국 지도자들도 모두 친중 정부인가? 이 프레임은 외교를 토론의 영역에서 공포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이재명 외교의 핵심은 실용이다. 실용은 중립이 아니다. 계산이다. 어느 선택이 더 많은 이익과 더 적은 위험을 가져오는지를 따지는 태도다. 실용 외교는 그래서 설명 책임이 무겁다. ‘믿어달라’가 아니라 ‘왜 이 선택이 합리적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윤석열 외교가 가치라는 단어로 설명을 생략했다면, 이재명 외교는 설명을 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재명 외교는 더 위험하고, 동시에 더 민주적이다.
이재명 정부는 한미동맹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맹을 신앙처럼 대하지도 않는다. 동맹은 국익을 위한 수단이지, 외교 사고를 중단시키는 주문이 아니다. 미국이 언제나 합리적이라는 전제는 이미 국제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 가능성, 동맹국을 향한 관세 압박, 유럽을 흔드는 미국 외교를 보라. 이런 상황에서 동맹 일변도의 외교가 과연 책임 있는 선택인가?
중국과의 외교는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조건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 외교는 현실을 외면한 외교다. 이재명 외교는 이 불편한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는 ‘중국과 외교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하느냐다. 이 지점에서 이재명 정부는 시험대에 오른다.
윤석열 외교의 가장 큰 문제는 결과 이전에 방식이었다. 외교를 대통령의 결단 영역으로 밀어 넣었고, 국회와 시민을 배제했다. 이것은 단순한 스타일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외교는 비밀이 필요하지만, 비공개가 기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윤석열 정부는 외교를 ‘속도전’으로 운영했고, 그 결과 설명은 늘 사후적이었다. 이재명 외교는 반대로 가야 한다. 느려 보일지라도, 토론과 설명을 거쳐야 한다. 이재명 외교가 경계해야 할 지점도 분명하다.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원칙을 지우는 순간, 윤석열 외교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닮아가게 된다. 인권, 평화, 노동의 문제를 외교에서 완전히 삭제한 실용은 또 다른 형태의 무책임이다.
윤석열 외교는 한국을 줄 세웠다. 이재명 외교가 해야 할 일은 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줄 세우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외교의 성패는 어느 편에 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택지를 국민에게 남겼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 외교는 쇼가 아니다. 외교는 신념의 과시도 아니다. 외교는 국민의 삶을 덜 위험하게 만드는 기술이다. 이 기준 앞에서, 이제 윤석열 외교는 평가받았고, 이재명 외교는 시험대에 올랐다. 그 시험의 결과에 따라 한국의 운명은 크게 바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