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mpire strikes back!-신제국의 귀환과 대안의 부재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제국은 언제나 ‘힘’만으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로마는 군단으로 세계를 정복했지만, 로마법과 시민권으로 제국을 지속시켰다. 대영제국은 해군력으로 바다를 장악했지만, 자유무역과 금융 네트워크로 제국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고전적 제국주의의 핵심은 강제와 보상의 균형이었다.
로마는 정복지에 세금을 부과했지만 동시에 도로와 치안과 법치를 제공했다. 영국은 식민지를 수탈했지만, 동시에 ‘제국 질서 안에 있으면 일단 안전하다.’라는 환상을 심었다. 제국은 늘 이렇게 말해왔다.
‘우리를 따르는 편이 결국 너희에게도 이익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세계 최고의 제국이 된 미국은 이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계승했다. 군사력보다는 동맹 체제, 식민지 대신 국제기구, 직접 통치 대신 규칙 기반 질서를 수립했다. 이를 위한 브레튼우즈 체제, IMF, 세계은행, WTO는 모두 바로 이러한 ‘미 제국’의 부속 장치였다. 여기에서 핵심은 마치 미국이 이를 세계 모든 나라의 안녕을 위한 선의에서 무상으로 제공한 것처럼 보였다는 착시다.
그러나 역사가 잘 말해주는 것처럼 ‘제국’의 유지 비용은 언제나 존재한다. 로마는 시민의 세금으로, 영국은 산업 노동자의 착취로, 미국은 막대한 재정적자와 군사비로 그 비용을 감당해 왔다. 그런데 모든 제국은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기 마련이었다.
‘이 비용을 언제까지 우리만 감당해야 하는가?’
이른바 ‘트럼프주의’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이는 반제국주의가 아니라, 제국 유지 비용을 다른 국가에 전가하는 전략의 시작이다. 고전적인 제국이 내부 붕괴로 무너졌다면, 미국이라는 새로운 제국은 동맹의 이탈로 흔들린다. 이제까지 무료로 사용해 왔는데 갑자기 사용료를 내라고 하면 누구나 흔들리게 되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동맹은 더 이상 동맹이 아닌 것이다. 동맹과 연대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결별을 각오할 것인가? 트럼프의 미국은 그 갈림길에 서 있다.
트럼프주의는 단순한 포퓰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내부 반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고전적인 ‘제국의 책임’을 거부하는 신제국주의다.
자유주의 질서의 핵심 전제는 간단했다. 제국인 미국은 규칙을 만들고, 동맹은 그 규칙을 따르며, 미국은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제는 냉전 체제 아래서 소련이라는 명확한 적이 있을 때만 성립했다. 그래서 1990년대 냉전이 끝난 뒤, 미국 내부에서 질문이 쌓이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적이었던 독일과 일본을 지켜야 하는가?’
‘왜 우리는 동맹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무역적자를 감수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멀리에서 벌어지는 남의 전쟁에 개입해야 하는가?’
그런데 트럼프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 그 철학의 핵심은 단순하다.
‘국가는 거래 주체이지, 도덕 주체가 아니다.’
이는 당연히 평생 사업가로 살아온 트럼프의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그에게 삶은 거래일뿐이다. 그래서 관세는 도덕이 아니라 협상 카드가 되었고, 동맹은 가치 공동체가 아니라 비용 청구 대상이 되었다. NATO는 방패가 아니라 마치 저렴한 ‘구독 서비스’처럼 취급되었다. 방위비를 내지 않으면 보호도 없다. 이러한 트럼프의 철학은 홉스의 철학적 사유와 흡사하다. 국제사회는 무정부 상태이며, 국가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 마련이라는 사유에서 트럼프의 철학은 시작된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이러한 홉스의 계보를 잇는 철학을 채택할 경우, 그동안 미국이 스스로 만들고 지켜온 질서를 부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트럼프주의는 제국을 해체하지 않는다. 대신 제국을 용병 시장으로 전환시킨다. 바로 이것이 동맹국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다. 용병을 쓰려면 돈을 지불해야 하니 말이다.
일부 학자는 중국이라는 ‘대안’을 놓고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현실을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것이다. 사실 미·중 갈등의 본질은 무역도, 관세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신기술’을 통한 질서 결정권의 문제다. 과거 패권국은 군사력으로 질서를 만들고 유지했다. 그런데 21세기의 패권은 과학 기술의 ‘표준’을 누가 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 AI, 통신, 배터리, 우주 기술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정치적 인프라다. 이 인프라의 바탕은 신기술이다. 그런데 이 신기술 경쟁에서 중국은 이제 미국의 강력한 경쟁자가 되고 있다. 중국의 기술 발전은 많은 부분 미국의 것을 벤치마킹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미국의 기술을 훔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불공정 경쟁자’라고 부르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질서 파괴 가능성’이다. 어느 사이 중국이 그동안 미국이 독점한 세계 질서를 흔드는 강력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특히 중국이 기술 표준을 주도하는 순간, 미국은 규칙 제정자의 위치를 상실한다. 그래서 이 전쟁은 양보로 끝나지 않는다. 관세는 협상이 가능하지만, 반도체 칩 설계, AI 알고리즘, 데이터 주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 20세기의 양차대전에 비할 바 없는 엄청난 국제 전쟁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제 기술 자립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체제 생존 문제다. 그래서 미국이 기술 봉쇄를 강화할수록, 중국은 더 폐쇄적이고 국가 주도적 기술 발전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동안 동맹의 우산 아래 안주해 온 ‘중립국’이다. 미국 중심의 기술 공급망은 분절되고,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 대안으로 등장한 중국은 아직 의심스러운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러나 ‘중립국’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에 처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made in China 제품의 홍수에 밀려 살아왔다. 저렴한 제품 덕분에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이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기술과 맞먹고 드론과 AI 그리고 로봇 분야와 같은 중국이 조금 앞서는 것으로 보이는 기술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편의 기술을 쓸 것인가?’는 정치적 입장 표명이 되어 버렸고 이는 한 국가의 미래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미국의 동맹국의 환상을 깨뜨렸다. 미국은 이제 동맹국의 위기에 자동 개입하지 않는다. 국제법은 스스로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양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재무장을 선언했고, 프랑스는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유럽은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지만, 미국이 언제든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미의 여러 나라는 ‘탈 미국’의 기조를 여전히 추구하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도 미국과의 거리를 두는 수순을 밟고 있다. 트럼프의 재등장은 특히 유럽 여러 나라에 명확한 메시지를 주었다. 미국은 더 이상 ‘공공재’ 제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러시아가 주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위협이다. 유럽은 이제 스스로 질문해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과연 미국 없는 유럽 질서는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골치 아픈 처지에 놓인 것이 한국과 일본이다. 한국은 기술, 안보, 경제를 미국에 철저히 의존해 온 국가다. 여기에 지난 몇십 년 동안 확대해 온 중국과의 경제 교류는 이익과 더불어 잠재된 위험을 키워왔다. 그래서 한국은 한미동맹, 대중 무역, 반도체 공급망이라는 삼중 구조 안에서 줄타기를 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 비용은 감당할 수준이 안 될 정도일 것이다. 한국과 비슷한 분단국의 아픔을 겪은 독일은 미국에 의존하지만 미국을 불신하고, 중국과 거래하지만 중국을 경계한다. 일본은 군사적 정상화를 통해 선택지를 넓히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 전략은 하나다. 완전한 편승도, 완전한 중립도 피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맞는 전략은 무엇일까? 일단 세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분절된 양극 체제에 적응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과거 미국과 소련의 블록을 형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술과 안보를 중심으로 한 블록을 형성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이른바 ‘중견국’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상황에서 한 나라를 선택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을 버리고 중국을 택할 것인가? 이는 단순한 고통 이상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는 트럼프주의가 사라진 이후에 등장한 이른바 ‘느슨한 다극 질서’이다.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되지만 붕괴하지 않는 사이에 여러 지역의 이른바 ‘소강국’이 등장하여 자율성을 확대한다. 러시아가 군사강국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관리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중국이 러시아를 대체하기에는 아직 불신이 많은 상황에서 이는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명확한 질서도, 완전한 붕괴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위기는 상시화 되고, 예외가 규칙이 된다. 그래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하고 그 상황을 누구도 주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사회적 소외자들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계 질서는 자연스럽게 유지되지 않는다. 제국은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순간 흔들린다. 지금 트럼프가 벌인 ‘소동’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오늘도 트럼프의 미국은 세계에 묻고 있다.
‘너희는 이 질서 유지를 위해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는가?’
그런데 세계는 이제 미국에 되묻고 있다.
‘돈을 내야 한다면 세계는 왜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트럼프가 던진 신제국주의라는 돌의 파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물리학의 법칙대로 엔트로피가 증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전 세계의 무질서가 극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물리학의 법칙을 잘 알고 있다. 우주 질서는 궁극적으로 평형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동양철학에서는 극즉반(極卽反)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든 극에 이르면 그 반대의 현상이 나타나 균형을 이루게 되는 법이다. 과연 트럼프주의가 극에 이르면 나타나는 반(反)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하다. 문제는 이 평형이 인류에게 더 나은 질서일지, 아니면 모두가 더 가난해진 균형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