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Mar 04. 2021

정인이 양부모와 기독교의 ‘셀프 용서’ 관행

기독교는 변했다.

      

16개월 된 정인이를 살해한 양부모의 가족 관계에서 기독교가 주요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양부모의 부모, 곧 정인이의 양조부가 목사이고 양부도 기독교 단체에서 근무했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양부인 안모 씨가 3차 재판을 받고 나오는 길에 취재진을 피해 달리다가 갑자기 길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장면이 언론에 나오면서 기독교의 용서 관행에 대한 네티즌들의 풍자가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인들은 이른바 ‘셀프 용서’를 잘하니 좋겠다는 비난이 나온다.  

    

안모 씨가 무릎을 꿇고 한 말은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이다. 물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이 ‘죄송하다.’ ‘살려 달라.’는 말은 신앙의 본질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신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기본자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신이 자비를 베풀어 용서를 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 사실 잘 모른다. 사람의 마음도 잘 모르는 데 신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제도 교회는 특히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 면죄부가 결국은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업자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죄의식을 이용한 장사를 안 했는가? 물론 매우 수익이 짭짤한 이 장사를 개신교라고 안 할 리가 없다. 면죄부를 비난하고 나온 개신교이니 면죄부를 대 놓고 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 목사의 권위로 죄를 용서해 주는 제도는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헌금과 주일 예배 참석이다. 헌금을 많이 하고 주일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 죄를 용서받은 징표라는 것이다.     


사실 중세까지 기독교는 신자들의 죄의식을 강조하여 통제하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교회에 와야 하는 근본 이유도 죄 때문이었다. 그래서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신음하는 모습이 매우 강조되었다. 마치 신자들의 잘못으로 주님인 예수가 고난을 받는 것처럼 세뇌를 한 것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잘못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였으니 신자들이 이른바 ‘네 죄를 네가 알렸다.’의 마음가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신부나 목사에게 대신 사과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과의 마음을 담아 헌금을 하고 십일조를 내고 그것도 모자라 면죄부까지 사야 하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인문주의와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신의 자리가 좁아지면서 교회의 권위도 따라 추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성과 재물에 관련된 추문으로 신부와 목사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더욱 교회가 신자들에게 죄만 물을 수가 없게 되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먹고사는 것도 벅찬데 문제가 많은 교회에서 죄의식만 강요하고 돈과 봉사를 요구하는 것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도 살아남기 위해 교리를 바꾸게 되었다. 죄를 강조하기보다는 믿으면 복을 받는 이른바 기복신앙적인 추세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어떤 교회 같은 경우는 아예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죄의 용서의 표징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른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교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죄의 용서는 신의 전권이 아닐 뿐 아니라, 인간 곧 신부나 목사가 대신해 주지 않아도 되는 신자 자신과 신 사이에서 직접 해결되는 이른바 ‘셀프 용서’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죄의 고백과 용서를 간청하기보다는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모르는 신의 자비로 잘 먹고 잘 살기를 도모하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행태는 신자가 아니라 신부와 목사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 주었다. 전 세계의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이 아동에 대하여 긴 세월에 걸쳐 성폭행과 추행을 일삼았음에도 가톨릭 교회는 이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교회 제도 안에서 주교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은폐해 왔다. 그렇게 ‘셀프 용서’를 한 것이다. 그러다가 미국의 보스턴 교구 같은 경우 교구 자체가 배상소송금으로 파산하기에 이르기도 하였다. 미국의 유명한 개신교 목사들의 경우도 다를 것이 없었다. 매우 유명한 미국의 한 텔레반젤리스 목사는 아내를 두고 외도를 벌인 것이 발각되자 예배 방송에 아내와 함께 나와 통곡을 하며 용서를 청하였다. 그리고 ‘셀프 용서’를 하며 계속 목사 생활을 하였다.     



그런 것을 보고 신자들도 확신을 얻은 것이다. 곧 ‘셀프 용서’는 가능한 것이라고. 그래서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 사이에 ‘셀프 용서’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물론 죄를 고백하고 자비를 구하면 용서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고 진정으로 참회했는지 어찌 아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인데. 앞으로 돌아가서 정인이를 학대하고 살해한 양부모가 진심으로 참회하는지 어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양조부인 목사의 말대로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는데 과연 여론 재판을 할 수 있을까? 이는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 아닌가? 문제가 단순하지가 않다.     


이와 연관하여 요즘 연예인과 체육인들 가운데 과거 악행이 드러나며 이른바 ‘하차’하는 사례도 참조할 만하다. 과거 학창 시절에 이른바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악행을 저지른 자들이 자필로 참회의 글을 써서 SNS에 올려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KBS의 연속극에 출연 중인 지수이다. 그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른바 ‘참회의 글’에서 “저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분께 무릎 꿇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라고 했다. 카메라 앞에 나온 것도 아니고 댓글도 못 쓰는 SNS에 자기 멋대로 자기 방식대로 사죄하고 있다.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가? 이들이 진정으로 참회하고 죗값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어찌할 수 있는가? 이들이 이렇게 글을 SNS에 올리는 것만으로 ‘셀프 용서’를 하는 것이 정당한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에서 참으로 회개한 사람을 식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나온다. 울고불고 무릎 꿇고 대중에게 요란하게 나서서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 진정한 참회가 아니다. 진정한 참회를 한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열매는 알 수 있다. 참회를 한 사람의 마음이 맺는 열매는 명료하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이다.     


9가지에 이르는 이 열매는 바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예절, 극기이다. 


그 ‘셀프 용서’하는 죄인들이 보여주는 태도에 이러한 것들이 풍겨 나온다면 그는 진심으로 참회한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심지어 그에 반대되는 악의 열매가 느껴진다면 그는 아직 참회한 것이 아니다. 악의 열매도 성경에 나와 있다.     


그것은 바로 간음, 음행, 부정, 음탕, 우상 숭배, 마술, 증오, 불화, 경쟁, 분노, 다툼, 난동, 질투, 살인, 만취, 환락이다.      


위에 언급된 이른바 참회하는 이들,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서 여전히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참회한 것이 아니니 그들의 ‘셀프 용서’는 무효다.     


근본적으로 용서는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만족해야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용서는 일방적일 수 없다. 쌍방적인 것이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무효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인이와 시우를 죽인 독실한 기독교인이 예외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