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붓엄마 박씨는 교회 봉사활동을 열심히 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시우를 버클리음대에 보내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우겠다며 교인들에게 자랑도 했다. 하지만 박씨의 지인들은 “어릴 때부터 거짓말을 많이 했다. 부자도 아닌데 부자라고 하고 다녔다”라며 “성형을 많이 하고 다녔고 남편도 시켰다. 나중에 남편 얼굴이 완전히 달라져 있더라”라고 입을 모았다.(참조: https://www.etoday.co.kr/news/view/2231838)
당시 A군은 머리에는 바지를 뒤집어쓰고 의자에 묶여있었다. 계모는 커튼 끈으로 시우의 팔다리를 의자에 묶고 홈캠으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폭언을 퍼붓고 새벽 5시부터는 아이를 깨워 성경 필사를 지시했다. A군은 사망 전 16시간 동안 의자에 묶여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참조: https://v.daum.net/v/20230320102326265?f=p)
시우는 지난 2월 7일 인천의 한 병원 응급실에 심정지 상태로 도착했다. 11살의 초등학생이었던 시우의 사망 당시 키는 149cm 몸무게 29.5kg이었다. 참고로 11세 남아의 표준 키와 체중은 각각 144.7cm, 40.2kg이다. 온몸에 여러 날에 걸쳐 폭행당한 흔적인 멍이 가득했고 허벅지에는 상처가 수십 군데였고 항문 쪽에는 화상으로 인한 피부 변형 발견되었다. 의사가 최종적으로 내린 사인은 많은 둔력에 의한 사망. 오랫동안 맞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말이다. 시우의 친부는 5년 전 이혼하고 현재의 아내와 재혼하였고 시우는 계모에게 학대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계모가 전처의 자녀를 학대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한 일이기에 별로 새삼스럽지 않다. 물론 계모임에도 전처의 자녀를 친자녀 못지않게 키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계모의 전처 자녀에 대한 학대나 방임은 이른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도 짐승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유전자를 전해주려는 이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경우에도 시우의 친부까지 모든 죄를 계모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방송에서는 친부 자신도 시우에게 폭력을 가한 것으로 확인했다. 계모의 폭력은 친부의 동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사실인데도 전통적인 계모 프레임을 이번에도 동원하고 친부가 빠져나가려는 수작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간의 본능을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어쩌지 못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의 광기가 더해지면 비기독교인보다 더욱 광폭해진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자. 초대교회는 평화주의를 굳게 내세웠다. 예수가 평화주의였기 때문이지만 현실적으로 기독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생존을 위해서 평화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패거리가 갈려 예수에 대한 해석이 다르다는 핑계로 ‘적’을 무자비하게 단죄하는 경향은 변함이 없었다.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반대파를 저주하고 악마로 몰아가기 일쑤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집안싸움으로만 끝나고 말다가 돈과 권력이 쌓이기 시작하자 외부 세력, 특히 정치 세력까지 끌어들여 ‘원수’를 몰아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 형제자매인데 악마화하여 처단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극단적 배타성은 이렇게 태생적인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유일 종교가 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는 기독교 내부의 ‘적’만이 아니라 기독교 외의 모든 것을 악마화하여 처단하고 나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정치권력과 철저히 결탁한 기독교의 역사에서 피비린내가 늘 진동했다. 그런데 살인, 강간, 폭력, 강도질을 밥 먹듯이 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거룩한 예배에 참석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다시 살인, 강간, 폭력, 강도짓을 계속했다. 이렇게 악행과 용서를 비는 행위를 번갈아 하면서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신분열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곧 한 손으로는 죽을죄를 짓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나중에는 아예 살인을 하는 순간 기도를 드리는 신공을 발휘하는 경지까지 올랐다. 이런 전통은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던 히틀러도 이어받았다. 무솔리니는 물론이고.
이런 기독교의 죄악사는 그 역사가 매우 길어 한두 페이지로 정리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독일의 데슈너(Karlheinz Deschner, 1924~2014)는 <기독교의 죄악사>(Kriminalgeschichte des Christentums)라는 10권짜리 역작을 1986년부터 2013년까지 27년에 걸쳐 출판한 바가 있다. 이 책에서 데슈너는 구약에서부터 이어져온 유대-기독교의 죄악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이 책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살인은 물론,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에 관한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예수는 분명히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그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자처하는 기독교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행적을 보여왔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가톨릭 신부의 아동 성폭행, 목사의 간통, 교회의 범죄 은폐는 이 책 다음 시리즈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아쉽게도 독일어로 쓰인 이 책은 현재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그리스어로만 번역되어 있다. 언젠가 한글로 번역될 날이 올 것이다.
다시 시우 계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정확한 교파는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모양이다. 교회에 가서도 전처의 아들 자랑을 하고 아이에게 성경 필사를 시킬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독교 교회에서는 이런 계모가 기독교 신자이기 이전에 성격 자체가 사악한 존재로 몰아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책임회피다. 주일에 예배드릴 때마다 목사나 신자나 한결같이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러니 교회는 원래가 죄인들의 집이다. 죄가 없다면 사실 교회에 모일 필요가 없다. 문제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 죄에 합당한 값을 치르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신자는 물론이고 교회의 ‘주인’을 자처하는 목사도 새사람이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을 어찌 아냐고? 간단하다. 성경에 나와 있다.
바울 신학 전통의 기독교에서 육은 죄와 관련되고 성령은 선과 관련된다. <신약성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시비하지 말고 서로 시기하지 맙시다.(갈라 5,19-26)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이 가운데 한 가지라고 있으면 그 교회는 예수의 참다운 제자가 모인 곳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실천하는 자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무엇이 더 많은가? 지금 당장 주일에 아무 교회에 나가서 확인해 보면 된다. 과연 그 교회 안에 육의 열매가 있는지 아니면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주일마다 착실히 교회 나가서 ‘주여 주여’ 한다고 결코 예수의 제자가 아니다. 예수가 직접 그렇게 말했다. 다음 성경 구절에 나온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의 뜻이 아닌 것인데도 요즘도 많은 교회에서는 이런 짓을 한다. 그리고 그런 예언, 구마, 기적을 신앙의 징표로 삼는다. 게다가 어느 교회에서는 헌금을 많이 했더니 그 몇 배 되는 돈을 벌게 되었다고 '신앙간증'까지 한다. 삼중 사중의 축복을 받았단다. 예수가 돈 많이 벌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축복이라고 한 적이 있나? 지들 맘대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핵심 교리도 마음대로 바꾼다. 한마디로 한국의 기독교는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도 성경에 나온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 34-46)
예수가 말하는 신의 뜻은 이렇게 자명하다. 헐벗고 굶주리고 갇힌 이들과 따뜻한 옷과 음식을 나누고 함께 있어주는 것을 신은 바란다. 주일에 교회 건물에 모여 입으로만 죄를 고백하고 반성하면서 자기들끼리 희희낙락하며 즐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더구나 그 교회 문을 빠져나오는 순간 반성하는 척도 안 하는 것을 신은 더욱 바라지 않는다.
헐벗고 굶주리고 갇힌 이들, 특히 우리 인간의 형제자매인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조차 외면하고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에 몰두하느라 바쁜 기독교인은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적그리스도가 현재 대한민국 교회 안에 넘치고 있다. 시우의 계모도 그런 것만 교회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러니 주일 예배를 열심히 참석하고 성경필사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헐벗고 굶주리고 갇힌 전처의 아들 시우에게는 악마짓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가 예수의 참 제자답게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를 실천했다면, 그래서 시우의 계모가 성령의 열매를 먹었다면 그런 짓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 교회와 깊이 관련된 어른이 아동학대를 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언론에 보도된다. 2020년 10월 13일 계부모인 안성은과 장하영의 장기간에 걸친 학대로 사망한 정인이 사건은 이미 세간에서 잊혀졌지만 겨우 2년 넘은 사건이다.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인 이 두 사람은 악명 높은 홀트아동복지회에서 8개월 된 정인이를 입양한 지 8개월 만에 살해했다. 장하영의 경우 아버지가 경상도에서 목사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부의 독실한 기독교인 생활이 소문이 나서 TV 방송까지 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동 살인자였다. 그럼에도 그 여자의 아버지는 지금도 여전히 목사로 십일조와 헌금을 뜯어먹고 있겠지? 제발 십일조 받아 먹고 잘 살달가 지옥가기 싫으면 아이는 건드리지 말기 바란다.
아이는 꽃으로도 때리면 안 된다. 기독교인은 더욱 안 된다.
바로 사랑과 평화만을 말하고 스스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도 내놓은 예수를 믿는다면서 정작 생활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한 참 벗어나는 짓을 하면서도 주일 예배를 뻔뻔하게 드리고, ‘사랑합니다 자매님’ ‘사랑합니다 형제님’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야말로 정명석과 같은 사이비 교주의 든든한 텃밭이 되는 것이다. 이들이야 말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은 언제나 같다. 시우나 정인이를 죽인 기독교인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는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모두 형제자매인데 모른단다. 기독교인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가 바로 나의 형제자매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예수가 직접 가르챴음에도 여전히 모른다. 그리고 끼리끼리 모여 즐겁게 사면 그만이다. 교회가 믿음의 집 기도의 집이 아니라 즐겁게 모여 노는 사교의 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 안에 모인 바로 이런 적그리스도가 사라지는 그날이 바로 예수가 바로 서는 날이 될 것이다. 그전까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집안에서 정인이와 시우 같은 아동 폭력 피해자가 줄을 잇게 될 것이다. 회개와 참회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핏대를 올리며 광분하는 이른바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언제나 사라질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