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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Jan 09. 2023

para bellum, 전쟁을 준비하라고?

전쟁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 하는 것이다.

북한이 공개한 핵탄두 Ⓒ 헤럴드경제 캡쳐


북한이 최소 10여개의 핵탄두를 언론에 공개했다. 국민의힘의 태영호는 이 사진에 나온 핵탄두가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밝혔다.(참조: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230329000548) 미국의 핵항공모함인 니미츠호는 이미 부산항에 전개되고 한미 해군과 해병대는 3월 29일에 포항 지역의 바다와 하늘에서 상륙돌격 훈련을 했다. 규모도 사단급이다. 여기에는 일본 오키나와나 괌이 아니라 미 본토에서 직접 날아온 미해병대도 참가하였다. 아날 연합상륙훈련 명은 '쌍룡훈련'이었다. <조선일보>는 이 훈련이 사실상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한 침투를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참조: https://www.chosun.com/politics/diplomacy-defense/2023/03/29/ZOCYL5MCGJF2DCCHXMPDGQ7WEE/)   


이렇게 시절이 하도 수상하니 전쟁에 대한 공포가 다시 퍼지고 있다. 이런 공포스러운 때 문득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로서 이른바 Ostpolitik, 곧 동독과의 화해 정책을 추구하는 데 한 축을 이룬 Helmut Schmidt가 한 말이 더욱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Lieber 100 Stunden umsonst verhandeln, als 1 Minute schiessen.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단 1분 동안이라도 총질하느니 차라리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100시간 협상하겠다.”   

  

이야말로 진심으로 국민의 생명을 아끼는 참다운 국가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 인물 해야 할 생각 말이 아닐까? 전쟁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국가 지도자는 ‘para bellum’을 쉽게 입에 올린다. para bellum은 무엇인가? 길게는 ‘si vis pacem para bellum’이다. ‘네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말이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한 말이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키아누 리브스의 <John Wick> 시리즈 3편의 부제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 제목에도 Para Bellum으로 축약되어 나왔다. 그런데 이 말은 흔히 베게티우스로 알려진 레나투스(Publius Vegetius Renatus)가 4세기 후반에 쓴 것으로 알려진 <군사론>(de re militari)에 나온 말을 변형한 것이다. 베게티우스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Igitur quī dēsīderat pācem, præparet bellum.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 평화를 원하는 자는 전쟁을 준비하도록 하라.”     

 

물론 그 이전에 다른 사람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으나 문헌으로 이런 식으로 정형화한 것은 베게티우스니 그가 한 말로 치자. 그런데 문제는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평화주의자였던 예수를 교주로 모신 그 기독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평화에는 전쟁 준비밖에 없다고 큰소리친다. 참으로 이상한 문화다. 비폭력주의와 평화주의의 아이콘인 예수를 믿는다면서 유럽 대륙을 피로 물들여온 것이 유럽인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전쟁을 옹호한 것은 베게티우스만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주창한 전쟁론 이른바 ‘정의로운 전쟁론’(bellum justum)은 여전히 ‘먹히는’ 논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원래 지독한 마니교 신자였다, 마치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지독한 유대교 신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상하게 기독교는 ‘배교자’가 큰소리치는 종교다. 유대교와 마니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나서 이른바 ‘사도’가 되었음에도 유대교적인 정신을 전혀 못 버린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의 최고 지위인 주교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마니교적인 사상을 전혀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이 두 사람은 기독교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사산제국(226~651)의 마니(Μάνης, 216~274)가 교주인 종교다. 기독교는 여러 종교를 탄압했지만 특히 마니교에 대해서는 거의 무자비할 정도였다. 역설적으로 마니교가 그 당시 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 말이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마니교에 대한 기독교의 탄압이 거세지자 ‘배교’ 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를 ‘숭배’하는 무리에게는 신성모독적인 평가이겠지만 말이다.   

  

마니교는 참다운 신인 우주의 아버지 곧 ‘아바 데라부타’(Abbā dəRabbūṯā)를 유대교(아담), 예즈디교(자라투스트라), 불교(부처), 기독교(예수)에서 잘못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종교다. 그러니 모든 기성 종교의 배척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니교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마니는 유대-가독교 전통의 한 분파에 속하는 일종의 영지주의다. 무엇보다도 마니는 스스로가 진리의 영인 보호자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바로 예수가 요한복음에서 언급한 존재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6-17)     


위에서 말하는 ‘보호자’는 그리스어 성경에 보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다. 직역을 하면 옆에 서 있는 자다. 다시 말해서 재판정에서 나를 변호해 주기 위해 내 옆에 서 있는 자, 곧 변호사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 요한복음 사가는 아예 그 아래에 그 존재의 정체성을 ‘진리의 영’(τὸ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 교리는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예수의 참다운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가 버젓이 예수를 교주로 삼는 기가 막히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다시 마니교로 돌아가 보자. 마니교에서 예수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또한 불교의 윤회론도 핵심 교리다. 매우 포용적이고 유연한 교리를 담고 있기에 그 교세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자기와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종교를 다른 종교가 그대로 놔둘 리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가 앞장서서 맞서 싸우게 된 것이다. 결국 밥그릇 싸움이 가장 큰 법 아닌가?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도 기독교를 탄압하기에 앞서 마니교를 먼저 탄압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가 380년에 마침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지정하고 나서 마니교 사제들을 사형시킨다는 칙령도 382년에 발표하였다. 그 1년 전에 이미 기독교 사제들은 마니교 신자들의 로마 시민권을 박탈할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바로 이 무렵 충실한 마니교도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배교’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천하의 아우구스티누스도 목숨은 신앙보다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배교자가 근본주의자가 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물론 다 신의 뜻이리라.

        

문제는 충실한 마니교 신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마니교 탄압에 총대를 메고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기독교의 ‘적’을 물리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로 bellum justum, 곧 정의로운 전쟁론이다. 우리 편이 아닌 자들을 죽이는 것은 비록 그들도 신 창조한 피조물이라 하더라도 정의로운 일이 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인가? 도대체 예수가 성경 어디에서 그런 ‘정의로운’ 전쟁론 전개했다는 말인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에 속하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는 배교한 것도 모자라 자기가 원래 속한 종교 집단인 유대교와 마니교의 탄압에 가장 앞장을 섰으니 말이다. 그것도 야훼신과 예수의 이름으로 말이다.  

   

마니교에 대한 기독교의 박해는 중세에도 이어졌다. 그래서 맘에 안 드는 기독교 교파에는 모조리 ‘신마니교파’라는 딱지를 붙여 단죄하고 박해하였다. 마치 한국에서 맘에 안 들면 ‘빨갱이’로 매도하여 죽일 듯 덤비는 논리와 똑같다. 맘에 안 들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 아닌가?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바로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로운 전쟁론의 기본 사상은 바로 마니교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바울도 기독교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적대적인 관계로 해석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좀 더 노골적이었다. 마니교는 이 세상 선과 악, 빛과 어둠, 인간과 사탄이 싸우는 전쟁터로 보았다. 그리고 그 사탄은 실체적 존재로 악의 근원이 된다. 그래서 사탄은 신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마니교의 주장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대로 가져와 오히려 마니교를 사탄으로 여기며 정의로운 전쟁을 통해 멸망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보았다.     


예수는 세상을 전쟁을 통해서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기꺼이 중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형이라는 극단적인 형벌을 감수한 것이다. 예수는 자기 패거리의 이득이 아니라 신의 자녀인 모든 인류의 평화와 사랑과 구원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를 교주라고 모시는 자들은 결코 그를 따르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은 모조리 악마요 적그리스도라서 죽여도 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더 나아가 같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 구교와 신교의 대립에서도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가톨릭의 이름으로 개신교 신자를 살육하는 것이 정의로운 전쟁이었고 거꾸로 개신교의 이름으로 가톨릭 신자를 살육하는 것도 정의로운 전쟁이었다. 예수가 그렇게 자기 이름을 함부로 팔아서 전쟁을 벌이라고 권유한 적이 전혀 없음에도 말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싸움을 붙이지 말고 말리라고 권유하였다. 싸움을 피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리고 싸움이 나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라고 했다. 더구나 그 상대방이 원수라도 상관없다고 하였다. 어차피 이 세상의 권세가 예수의 목적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본래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난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는 서양에서 세련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정의로운 전쟁이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나뉘게 된다. 곧 정의로운 전쟁에서 jus ad bellum, jus in bello, jus post bellum이 갈라져 나오게 되었다.   

  

jus ad bellum 전쟁을 일으킬 정의로운 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로 들어보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될 가능성을 공격의 명분으로 삼았다. 또한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는 러시아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실제로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는 상당수의 러시아 국민이 살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 지역을 재통합하겠다는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분명히 명분 있는 전쟁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 국민의 보호는 핑계에 불과하고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가 실질적인 전쟁의 원인이다. 게다가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이전에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제삼자의 관점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 전쟁의 근본 원인은 러시아와 미국의 패권주의일 뿐이다. 나토의 동진이나 러시아제국의 서진이나 우크라이나의 국익과는 전혀 무관한 정책이다. 그러나 정작 전쟁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전쟁은 러시아와 서방 연합군을 대신한 우크라이나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와중에 결국 직접적인 희생자는 전쟁을 일으키고 진행한 것에 책임을 진 정치가들이 아니라 군인과 민간인들 뿐이다. 전쟁을 일으키고 진행시키는 푸틴과 젤렌스키 그리고 바이든은 매우 건재하다. 그들은 오늘도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쟁이 발발하면 대부분의 나라의 국민들은 그 전쟁을 일으켜 자신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정치 지도자에 대한 지지를 더욱 강화한다. 명분은 애국주의다. 나라를 지키자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집단 히스테리적인 애국주의가 나라를 휩쓸면서 이성이 마비되어 버리는 것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지지한 그 ‘애국 국민’이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     


과연 전쟁이 일어나면 누가 정의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한 정의인가? 그 정의가 무엇으로 정당화되는가? 이러한 합리적인 질문은 애국주의에 매몰되어 버린다. 그래서 jus ad bellum은 거짓이다.    

 

그다음으로 내세우는 jus in bello는 어떤가? 말하자면 기왕 전쟁이 일어났지만,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민간인 희생을 최소화하고 포로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원칙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과연 전쟁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일단 전쟁이 나면 정치가들은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군인들보다는 민간인의 피해가 막대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인은 최대 2,50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민간인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5,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의 사상자는 약 77만 명이었다. 그러나 민간인 사상자는 100만 명에 이르렀고 피난민은 650만 명에 달했다. 1950년 당시 인구는 남한 1,600만 명 북한 900만 명 정도였다. 4명 중 1명이 피난 생활을 한 것이니 결국 모든 가정이 피해 입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월남전은 어땠나? 미군과 연합군의 사망자는 약 28만 명이다. 베트콩은 40~60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그러나 민간인은 62만 명 정도로 확인되고 있다. 피난민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어떤 전쟁이든 민간인 피해자가 많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고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음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jus in bello도 말장난에 불과하다.     


jus post bellum은 어떤가? 전쟁이 끝난 다음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를 말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전범들에 대한 재판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이 끝나도 정작 전쟁의 주범인 각 국가의 지도자들이 정의의 원칙에 따라 처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패전국의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거나 처형당한 경우는 있지만 말이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민간인에 대한 보상은 더욱 난망한 일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정의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이른바 기독교의 신학자라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전쟁을 옹호하는 논리를 전개했으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역사적으로 볼 때 변절자가 가장 위험한 극단론자가 되는 법이다. 바울이 그랬고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랬다. 그런 자들이 자신이 전에 몸담았던 집단을 비난하고 나서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이들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 이른바 ‘극렬분자’가 된다. 참으로 추한 것이 인간이다.      


사랑과 평화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은 예수의 자기희생적인 삶은 딴 나라 이야기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오히려 나서서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모순적인 역사는 매우 길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 성직자들은 그리 당당한 것인가? 선배들을 믿으니 말이다. 2023년을 맞이하여 처음부터 우울한 소식만 난무한다. para bellum? ‘개 사과’나 던져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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