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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국부인가 독재자인가?

아데나워에 비추어 본 이승만의 국부 자격론 시리즈 1

by Francis Lee

대선이 가까우니 다시 이념 논쟁이 벌어질 모양이다. 특히 박정희와 전두환의 명백한 군사독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이미 내려졌으나 이승만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과연 이승만이 국부인가 독재자인가? 아님 둘 다이거나 둘 다 아닌가? 이런 질문에 대한 소모적 논쟁은 사실 국론 분열만 가져올 뿐 이른바 ‘영양가’가 없다. 그러나 박정희와 전두환과는 달리 이승만은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 정권을 유지하였지만 공화제의 근간이 되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훼손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의 지지 세력이 힘을 잃어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제도로는 재선의 가망이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대중의 인기를 누리던 이승만은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혼란한 가운데 1952년 1월 18일 직선제 개헌을 시도하였으나 압도적인 표차(찬성 19, 반대 143, 기권 1)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권력에 눈이 멀기 시작한 이승만은 폭력 조직인 민족자결단, 백골단을 동원하여 관제 데모를 일으키고 당시 국회의장인 신익희를 사실상 가택 연금까지 시켰다. 게다가 경상북도,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공비, 곧 ‘빨갱이’ 토벌이 명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을 헌병대로 강제 연행하고 그중 일부는 빨갱이로 몰아 체포하였다. 이런 폭거를 자행한 끝에 이승만은 7월 4일 국회에서 기립표결을 강행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큰 표차(찬성 163, 기권 3)로 통과시켰다. 이는 군사독재정권에서도 잘 볼 수 없었던 위헌 행위였다. 8월 5일에 치른 첫 직접 선거에서 자유당의 이승만은 74.6%의 득표율로 무소속의 조봉암(11.4%)을 누르고 2대 대통령이 된다. 1956년 선거에서도 70%의 득표율로 무난히 3선을 한 이승만은 1960년 3월 15일 그 유명한 부정선거에서 100%의 지지로 당선된다. 그러나 종신 대통령의 꿈은 4.19 의거로 무너져 망명객이 되고 만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선거제도를 직선제로 바꾸어 1963년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1.5%p 차이로 신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67년에 윤보선에게 10.5%p, 1971년 김대중에게 8%p차로 이긴 다음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1972년 유신헌법을 내세워 헌법을 개정하여 간선제로 바꾸고 나서 단일 후보 단일 선출이라는 독재 국가의 선거 방식으로 내리 2선을 한다. 그러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급사한 다음 최규하와 전두환이 그 전통을 계승하였다. 이렇게 민간 독재든 군사독재든 헌법을 마음대로 바꾸어 종신직을 노리도록 한 기폭제는 분명 이승만이다.


그런 그를 일부 세력은 국부라고 부른다. 국부란 무엇인가?


pater patriae, 곧 국부는 원래 로마 시대의 개념이다. 최초의 국부는 로마 왕국(BC 753-509) 시대의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BC 446-365)이다. 물론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Romulus)가 있지만 37년 통치 후에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랐다고 하니 그저 전설로 놔두는 것이 편하다. 그를 제외한 로마 왕국의 모든 왕은 국민이 선출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카밀루스는 다섯 차례나 dictator, 곧 독재관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로마 공화국 시대의 dictator는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력으로 통상 국가 위기 수습을 위하여 보통 6개월 시한으로 행사된다. 그래서 카밀루스는 사실상 독재자였음에도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시저(Gaius Julius Caesar, BC 100-44)가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공화국 정신을 훼손시킨 이후 이 독재관 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래서 이후에는 dictator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와 같은 영구 집권을 위하여 법을 맘대로 고치는 정치가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독재자는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독재-자(獨裁者)[-째-]

「명사」

「1」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처리하는 사람.

「2」절대 권력을 가지고 독재 정치를 하는 사람.


그런데 근대 국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정치 구도가 재편된 이후 절대 권력을 지닌 이들 가운데 국부(國父, Patres Patriae)의 개념이 적용되는 정치가들이 나타났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국부는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국부02(國父)[-뿌]
「명사」
「1」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임금01’을 이르는 말.
「2」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

사실 근대 이전에도 나라를 세운 왕들은 무수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왕정시대가 종말을 고했으니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부는 2번의 뜻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에서 사전적인 의미의 국부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같은 시기에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들로 국부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생국가의 독재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를 국부로 지칭한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또한 국부로 존경받는 인물들의 일생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통해 그들이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흠결이 많은 이들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 능력에서도 모자라는 부분이 많았고 인격적으로도 흠결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 상당수는 영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각 나라 안에서 신화적인 인물이 된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손문,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찌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도를 들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드골, 영국의 처칠, 독일의 아데나워를 들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 가운데 아데나워를 택하여 이승만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아데나워(1876-1967)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초토화된 독일의 질서를 빠른 시일 안에 회복하고 독일을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 차원에서 다시 선진국의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독일 근세사의 좋은 예라고 할 만큼 파란만장하였다. 그리고 정치계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모략과 권모술수에 능하고 권력을 탐하는 전형적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독일의 국부의 지위에 올라 모든 독일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여기는 존재가 되었다.


아데나워와 유사한 시기를 살다 간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물론 2-3대 대통령도 역임하며 건국의 토대를 다진 인물이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전에는 항일투쟁에 몰입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할 만큼 근대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1960년 국민의 의지로 권좌에서 쫓겨난 그는 하와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비극적 정치가의 인생을 마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인생의 말로가 전혀 다르게 마무리되었지만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지닌 정치가이다. 두 사람은 매우 장수하며 늦은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아데나워는 1949년 73세의 나이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이승만도 1948년 역시 7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1963년까지 14년간 권좌에 머물렀고 이승만은 1960년까지 12년간 권좌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정치를 펼쳤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된다. 그러면서 미국의 지원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은 똑같이 미국의 전후 경제 지원을 받은 나라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사회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여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이승만은 똑같은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기생 경제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GDP와 실질임금은 식민지 시대와 비교하여 거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독일의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단순히 전후 복구 붐으로 폄하하는 아벨스 하우저(Werner Abelshauser)와 같은 학자도 있다.


그리고 아데나워와 견원지간이었던 독일의 잡지 《슈피겔》(Spiegel)이 밝혀낸 자료에 따르면 아데나워는 정적에 대하여 중상모략까지 하는 권력에 집착하는 무자비한 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독일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독일 국민들에게 아데나워는 전후 독일의 국제적 위신을 다시 세워놓은 위대한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 아래 놓인 대한민국도 한국전쟁을 겪고 복구에 나섰지만 독일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경제만 놓고 볼 때에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이승만 정권이 지속되는 동안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 경제에서 계속 의존하는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계속 혼란을 겪었고 냉전시대의 동서갈등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정치적 진영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을 이룬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리는 것이 객관적인 것일 수 없고 결국 또 다른 논란을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드시 한 번은 정리를 해야 할 대한민국 근세사의 부채이기 때문이다. 이 부채를 탕감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발전을 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 부채를 약간이나마 갚아보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얼마나 갚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여러 모로 유사점이 많은 정치가이다. 그 가난한 성장과정과 고속 출세, 그리고 독단적인 정치 성향까지 비슷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일제 36년의 통치 이후의 초토화된 조국을 재건하면서 20세기의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질서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적응한 것까지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그 말로가 극과 극을 이루고 있다. 한 사람은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대다수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국부의 명성을 누리고 있고, 또 한 사람은 국민의 힘으로 권좌에서 강제로 물러난 다음 해외에서 생을 마무리한 비참한 망명 정객이 되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패전으로 초토화된 조국을 세계 최고의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고 다른 사람은 미국을 비롯한 해외 원조가 없으면 존립 자체가 어려운 나라를 만들었다. 게다가 그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이러한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모습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앞으로 연재할 이 글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기로 한다. 아데나워와 비교하게 된 것은 최근 마무리 한 아데나워 전기 번역을 통해 그가 감추고 싶은 것을 포함한 생에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전기는 한국에 많이 나와 있기에 비교 검증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비교하는 방법으로 진행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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