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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아데나워가 될 수 없던 사나이

국부론의 결론을 내보자.

by Francis Lee
독일 초대 수상 아데나워(1876~1967) ⓒ Wikipedia


대한민국이 고질적인 좌파 우파로 나뉜 현실에서 여전히 이승만은 진영 논리의 제물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승만의 ‘범죄’가 역사적으로 낱낱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이승만을 국부로 모시자는 세력이 한국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분명히 독재자였다. 그다음으로 나타난 독재자인 박정희와 전두환이 마음 놓고 권력을 휘두를 근거를 마련해 놓은 자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를 국부로 삼자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있다. 독재자와 국부는 배타적인 개념인가? 먼저 사전적 정의를 보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독재자는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독재-자(獨裁者)[-째-]

「명사」

「1」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처리하는 사람.

「2」절대 권력을 가지고 독재 정치를 하는 사람.


그리고 근대 국가,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정치 구도가 재편된 이후 절대 권력을 지닌 이들 가운데 국부(國父, Patres Patriae)의 개념이 적용되는 정치가들이 나타났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국부는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다.


국부02(國父)[-뿌]
「명사」
「1」나라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임금01’을 이르는 말.
「2」나라를 세우는 데 공로가 많아 국민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르는 말.

사실 근대 이전에도 나라를 세운 왕들은 무수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왕정시대가 종말을 고했으니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부는 2번의 뜻을 지칭하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에서 사전적인 의미의 국부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리고 유럽에서도 같은 시기에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들로 국부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생국가의 독재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스스로를 국부로 지칭한 경우도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아르리카의 신생 국가에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또한 국부로 존경받는 인물들의 일생에 관한 많은 연구들을 통해 그들이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매우 흠결이 많은 이들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 능력에서도 모자라는 부분이 많았고 인격적으로도 흠결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다. 결국 그들 상당수는 영웅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각 나라 안에서 신화적인 인물이 된 경우가 많다.

그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손문, 인도의 간디, 베트남의 호찌민,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도를 들어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드골, 영국의 처칠, 독일의 아데나워를 들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 가운데 아데나워를 택하여 이승만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아데나워(1876-1967)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초토화된 독일의 질서를 빠른 시일 안에 회복하고 독일을 유럽은 물론이고 세계 차원에서 다시 선진국의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독일 근세사의 좋은 예라고 할 만큼 파란만장하였다. 그리고 정치계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모략과 권모술수에 능하고 권력을 탐하는 전형적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독일의 국부의 지위에 올라 모든 독일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로 여기는 존재가 되었다.


아데나워와 유사한 시기를 살다 간 이승만(1875-1965)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물론 2-3대 대통령도 역임하며 건국의 토대를 다진 인물이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전에는 항일투쟁에 몰입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할 만큼 근대적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권력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1960년 국민의 의지로 권좌에서 쫓겨난 그는 하와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비극적 정치가의 인생을 마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인생의 말로가 전혀 다르게 마무리되었지만 여러 가지로 공통점을 지닌 정치가이다. 두 사람은 매우 장수하며 늦은 나이에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아데나워는 1949년 73세의 나이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이 되었다. 이승만도 1948년 역시 73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이후 아데나워는 1963년까지 14년간 권좌에 머물렀고 이승만은 1960년까지 12년간 권좌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정치를 펼쳤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냉전시대를 겪으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된다. 그러면서 미국의 지원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독일연방공화국은 똑같이 미국의 전후 경제 지원을 받은 나라다 그런데 아데나워는 사회시장경제 체제를 구축하여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에 비하여 이승만은 똑같은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는 기생경제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대한민국 국민의 GDP와 실질임금은 식민지 시대와 비교하여 거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독일의 기적과 같은 경제성장을 단순히 전후 복구 붐으로 폄하하는 아벨스 하우저(Werner Abelshauser)와 같은 학자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도 한국전쟁을 겪고 복구에 나섰지만, 독일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경제만 놓고 볼 때에 이승만과 아데나워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한국에서는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정치적 진영에 따라 그 평가가 극과 극을 이룬다. 정치적으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하는 것이 객관적일 수 없고 결국 또 다른 논란을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도를 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하여 이승만은 반드시 한 번은 정리해야 할 대한민국 근세사의 부채이기 때문이다. 이 부채를 탕감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발전을 논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그 부채를 약간이나마 갚아보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얼마나 갚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 책의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이승만은 국부가 될 만한 인물이 처음부터 아니었다. 그런 데다가 스스로 권력에 눈이 어두워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철저히 망가뜨린 범죄자다. 그리고 그 죗값을 당당히 치르지 않고, 그의 제2의 조국인 미국의 섬으로 도망가버린 치졸한 인간이었다. 구체적으로 이승만과 아데나워를 비교하여 이승만이 아데나워와 같은 국부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권위주의적 리더십: 이승만은 반대 의견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거나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 권위주의적 리더십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 민주적 지도자로서의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2. 공감대 형성 부족: 이승만은 아데나워와 달리 정파 간 공감대 형성과 협업 촉진에 실패해 분열된 정치 지형을 낳았다.


3. 부패 혐의: 이승만 행정부는 부패와 족벌주의에 대한 혐의로 시달려 대중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윤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명성을 실추시켰다.


4. 제한된 경제적 성공: 아데나워가 독일의 "경제적 기적"을 이끈 성공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한 반면,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한국에서 의미 있고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가져오지 못했다.


5. 야당 탄압: 이승만은 종종 야당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반대 의견을 억누르며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고 정치적 탄압 풍토를 조성했다.


6. 장기 비전의 부족: 아데나워는 장기 비전과 전략 계획으로 유명했던 반면, 이승만 정책은 종종 명확한 장기 비전이 부족하여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방해했다.


7. 사회적 문제 해결 실패: 이승만 정부는 불평등과 빈곤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8. 민족적 화해를 촉진할 수 없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적 화해와 치유를 성공적으로 추진한 아데나워와 달리 이승만의 지도력은 남한의 사회적, 정치적 분열에 기여했다.


9. 시민의 자유 침해: 이승만 정부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여 민주적 가치의 옹호자로서의 그의 입지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0. 국제적 인정 부족: 아데나워의 외교적 노력과 정치적 수완은 국제적 존경과 인정을 얻은 반면, 이승만은 강력한 국제 관계를 구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이승만이 리더십, 윤리적 행동, 합의 구축 기술 및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헌신으로 존경받는 아데나워와 같은 널리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앞으로 쓸 책은 3부작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제1권에서는 아데나워의 인생을 다룰 것이다. 제2권에서는 이승만의 인생을 다룰 것이다. 제3권에서는 이 두 사람의 인생을 비교하여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식민지에서 후진적인 독재국으로 망가뜨린 데 비하여, 아데나워가 독일을 전범국에서 유럽 최고 국가로 거듭나고 결국 세계적인 대국으로 만든 요인을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매우 긴 길을 갈 것이다. 그러나 특히 내년 총선에서 좌우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이승만 우상화 놀음이 가속화될 것이 예상되기에 최대한 속도를 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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