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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5. 2021

너 자신을 알라!

대선 주자만이 아니라 나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요즘 정치판을 보면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자들이 날뛰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이 60이면 공자가 말한 지천명(知天命)을 훨씬 지난 나이이니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모르는 것이 여전히 많다. 인간의 본래 한계가 아닐까 한다. 그래서 신이나 부처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들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존재를 믿는다고 꼭 지혜가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여전히 알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책 <형이상학>에서 인간은 본래 알고 싶어 하는 존재라고 하였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물리를 넘어서’(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ά)이다. 곧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있는 이른바 참된 지식을 논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지금의 모습 그대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것이 아니다. 서기 1세기경 로도스에 살던 안드로니코스(Ἀνδρόνικος ὁ Ῥόδιος)라는 학자가 또 다른 학자인 소아시아에 살던 스트라본(Στράβων)의 지하 창고에서 발견된 200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고를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로 묶어 정리한 것이다. 이런 형태의 책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좋아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뭐 어떠랴. 그 책을 성경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이 책만이 아니라 많은 책들이 심지어 종교적 경전까지 그 출처와 편제 과정에 의문이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그런 책들을 읽고 감동을 받고 심지어 신성한 책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리도 발견한다. 그런데 나는 암만 그런 책들을 읽어 보아도 그리고 60이 되어도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알고 싶다.    


사실 가장 모를 것이 내 맘이다. 60년 동안 나라고 믿고 살았지만 문자 그대로 내 맘 나도 모르겠다. 어떤 날은 내 맘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귀신이나 악령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세상을 내다보면 정말로 악마에 영혼을 판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말 모르겠다. 내 맘, 그들의 맘,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의 맘. 도대체 모르겠다. 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끓이는 내 맘을 가장 모르겠다.     


그래서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γνῶθι σεαυτόν)라는 말을 하여 우리의 자신에 대한 무지를 깨치려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기까지 한다. 사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 당시 델피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전랑(前廊, pronaos)에 새겨진 세 격언 가운데 하나였다. 나머지 두 격언은 ‘욕심부리지 마라.’와 ‘반드시 패망에 이를 것이다.’이다.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네 주제를 알아서 욕심부리지 말고 살아야 인생에 탈이 없다는 말이 되겠다.


물론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 말고도 피타고라스, 솔론, 탈레스 등 많은 이들의 이름으로도 알려진 것이기에 그 뜻이 다양하게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누가 최초로 이 말을 했고 아폴로 신전에 새겨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당시 민중들이 이 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이미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인 아이스킬로스(Αἰσχύλος, BC 525-455)의 작품으로 알려진 3부작 가운데 하나인 <쇠사슬에 결박된 프로메테우스>(Προμηθεὺς Δεσμώτης)에 이 말이 이미 나오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프로메테우스는 흙을 강물에 반죽하여 인간을 창조한 존재이다. 이는 유대교의 경전인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인간 창조 설화와도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런데 야훼는 인간이 자신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린 데 비하여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최고신인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주어 영원히 독수리에게 간을 뜯기는 징벌을 받게 되었다. 이는 어쩐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가며 고통을 당한 예수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스 신화에서 야훼에 비견되는 제우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존재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그런 제우스에 맞서 이미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당할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하여 그 형벌을 대신 받는다. 정작 그 불을 맘껏 사용하는 인간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하면서 말이다. 쇠사슬에 결박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간을 파먹는 독수리를 바라보며 그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한다.

 

사실 인간이 불을 달라고 프로메테우스에게 요청한 적도 없으나 그들을 애처로워하는 마음에서 그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불을 전해준 이 행위는 기독교에서 예수가 한 행위와 매우 닮아 있다. 예수 시절 그 누구도 예수에게 자신의 원죄를 대신 갚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스플랑그니초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 애간장이 끊어질듯한 사랑의 연민으로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며 신과 인간의 틀어진 관계의 회복을 주선하여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했다.     


나중에 제우스는 헤라클레스의 중재로 프로메테우스와 마지못해 화해한다. 예수가 야훼와 인간을 화해시킨 것과는 약간 다른 구조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포함된 올림포스의 12신(Δωδεκάθεον)들보다 한세대 앞선 티탄(Τιτάν)족의 아이페토스(Ἰαπετός)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다. 티탄은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6명의 아들과 6명의 딸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막내아들인 크로노스가 주도하여 아버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크로노스는 아들인 제우스의 반란으로 자신을 포함한 열두 티탄들과 더불어 타르타로스(Τάρταρος), 오늘날로 말하자면 지옥 또는 저승에 갇히게 되고 만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존재가 되는데 기독교에서는 야훼와 예수가 권력을 공유하는 것에서 큰 차이가 난다. 이른바 삼위일체론(Trinitas)과 기독론(Christologia)을 근간으로 한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예수고 예수가 신이며, 예수를 통하여 인간도 신적 존재가 되는 것으로 풀이한다. 사실 유대인들이 이미 자신을 신의 자녀들로 여겼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유대교는 철저히 가부장적 종교로 신과 인간의 관계가 철저히 수직적인, 이른바 갑을 관계였으나 예수의 등장으로 그 구도가 깨지며 인간의 우주에서의 지위가 비약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늘 신에게 당하기만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제우스와 테미스 사이에서 나온 클로토(Κλωθώ), 라케시스(Λάχεσις), 아트로포스(Ἄτροπος)라는 세 명의 운명의 여신(Μοῖραι)이 잣고 감고 자르는 실타래에 따라 그 명이 좌우되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사실 그리스어 ‘모이라’(mοῖρα)는 원래 ‘각자에게 주어진 몫’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이에 비하여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혜를 주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한 야훼의 명령을 어긴 대가로 치르는 벌 곧 출산과 노동의 고통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길을 예수가 열어주어 공짜로 영생의 복을 누리는 존재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공로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고 오로지 신의 자비와 은총만이 인간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요소가 된다.     

 

유럽의 지성사에서 인간의 본질, 곧 ‘나’를 이해하는 데에 이 두 신화, 곧 그리스 신화와 유대/기독교 신화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시아인 특히 유교의 전통이 3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나’의 이해에 그런 신화가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론이 전혀 없다. 그 출발점이 처음부터 ‘주어진’ 인간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원래 창조론도 없고 우주론도 없다. 11세기 송대에 와서야 겨우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나타나 <태극도설>을 중심으로 한 우주론과 창조론을 정립하게 된다. 공자도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사후 세계에 대한 질문을 무시하고 만다. 이 세상 일을 고민하기도 바쁜데 언제 영계를 논할 것이냐는 논리로 말이다.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아시아인은 공자의 사상에 동조한다. 비록 공부를 통하여 ‘머리’로는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 신화를 받아들이고 이 세상의 삶 자체의 의미를 무(無)로 돌려버리고 색계를 지양하는 것을 추구하는 불교의 우주론을 받아들여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저 이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뼛속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기독교와 같은 종교도 이 세상에서 ‘뽀대 나게’ 살며 플렉스 하는 데 사용되는 장식에 불과하다. 내세를 지향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독실한 신자, 더 나아가 성직자들마저도 이 세상의 감미로운 ‘즐거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엄연한 한국의 현실이다.     


이렇게 그리스/로마 신화 유대/기독교 신화, 불교 신화가 비빔밥으로 공존하는 가운데 유교적인 현세주의가 득세하는 한국에서 내가 ‘나’를 찾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그래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나를 몰라도 잘 먹고 잘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빤쓰 목사’로 유명해진 자가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나님 까불지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는 종교적으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해도 천벌도 안 받고 특히 기독교 신앙이 넘친다는 목사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한국이다. 그리고 승려들이 도박, 술, 여자 문제로 소란을 피워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것이 한국이다. 또한 성추행과 금전 관련된 추문에도 신부는 여전히 신부로 남는 것이 한국이다. 한국에서는 종교가 결코 신성하지 않고 세속에 철저히 물들었다. 원래 종교가 세속을 거룩하게 해야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말이다.     

  

그러니 나를 찾는 여정에서 종교에서 궁극적 답을 찾는 것은 무리다. 물론 신자들과 종교인들은 말한다. 극히 일부의 일탈적인 사례를 두고 싸잡아 비난하지 말라고. 그러나 과연 예수가 말한 계명을 한 점 부끄럼 없이 실천한 기독교인 어디 있을까? 부처가 말한 고집멸도의 길을 완성한 불자가 어디 있을까? 차라리 유교처럼 세간에서 입신양명하여 오복을 누리며 살다가 죽는 것이 ‘진정한 나’의 바람을 충족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나’의 됨됨이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모른척하며 아무런 부끄럼 없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설쳐대는’ 인간들이 오히려 ‘나의 본질’에 맞게 사는 것 아닐까?  그래서 그리 뻔뻔하게 오늘도 자기 변명에 골몰하는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뭔가 찜찜하다. 예수는 [사랑의] 진리를 알면 우리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했고, 부처는 무명(無明)을 극복하고 여여(如如)한 진아(眞我)를 알면 열반에 이를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는 말인가? 그저 이 세상에서 살 때까지, 운명의 여신들이 내 명줄을 끊을 때까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시고 남들을 짓밟고 이른바 ‘갑’이 되어 살다 가면 그만인가? 그래서 한국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국영수 학원을 자기 집보다 더 익숙하게 다니며 명문대와 대기업에 목을 매고 40대에 30억을 모아 은퇴를 꿈꾸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일갈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정말 자기가 누군지 알았을까? 그리고 소크라테스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난 부처와 공자가 가르쳐준 대로 살아서 ‘나’를 알아챈 사람이 있었나? 4대 성인의 가장 막내인 예수가 가르친 대로 산 사람은? 그런 위대한 분들이 태어난 지 2,000년에서 2,50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그 ‘나’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대로 본래 없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인가?      


그런데 그 본래 없다는 허상인 ‘나’를 위해 [극히 일부] 승려들이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맛난 육식과 술을 즐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주지육림을 즐기는 승려들은 부처가 육식을 금지하는 계율을 제정한 적은 없다고 반박한다. 살생을 하지 말하고만 했단다. 참으로 논리 정연한 변명이다. 내가 죽인 것은 안 먹고 남이 죽인 것은 먹어도 된다니. 그럼 결국 살생하는 도살장의 일꾼들은 무간지옥으로 떨어지고 그 고기를 즐긴 승려들은 열반에 드나? 그럼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손 안 대고 코 풀겠다.’는 심보인가? 소를 잡은 자는 구천을 헤매고 소고기에 곡차를 곁들인 승려들은 성불하려나 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주머니에 동전 한 닢도 넣고 다니지 말라고 한 예수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강남 노른자위 땅에 초대형 건물을 짓고는 사랑 타령을 하는 목사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분명히 흘린 음식으로 배를 채우던 라자로를 알지도 못하던 부잣집 주인이 지옥에 가서 탄식하는 이야기로 예수가 지상에서의 호의호식의 무의미성을 경고했건만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호화 건축물에서 ‘주여 주여’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자들을 보고 예수는 뭐라고 할까? 아멘, 할렐루야...     


아무래도 ‘나’를 찾고 참다운 삶의 길을 찾는 여정에서 도움을 준다고 큰소리치던 기독교와 불교에서 교주의 말을 충실히 체현하며 살아 모범이 될만한 사람을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안 보이니 종교계는 이제 그만 기웃거려야 할 모양이다. 그럼 어디 가서 ‘나’를 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말인가? 60이 되어도 계속 헤매고 다녀야 할 모양이다.  그런데 나 같은 필부인 개인이야 그저  그런 것도 모르고 살다가 가도 세상에 별 영향이 없지만 대통령이 된 자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면 또다시 우리 국민은 이명박과 박근혜를 만나게 될 것인데...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프로메테우스나 예수는 고사하고 유교에서 말하는 군자 비스름한 짝퉁 정도 되는 자라도 어디 있으면 참 고마울 노릇인데 안 보인다. 전혀...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쩌랴. 기왕 내딛은 길이니 끝까지 가볼 밖에. 혹시 아는가? 계속 가다보면 초인을 만나게 될지. 그런 희망으로 오늘도 꾸역꾸역 앞으로 나간다. Ohne Hast, ohne Halt의 심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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