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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03. 2021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참다운 어른의 덕목은 ego를 내려놓는 것이다.

영화 루시(Lucy)에서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새뮤얼 노먼 교수는 강의에서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 택하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한다. 상황이 열악한 경우에는 자신의 불멸(immortality)을 추구하고 최적의 상황이 되면 후손을 통한 재생(reproduction)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우연히도 조직범죄자들의 희생자가 되어 CPH4 운반책이 되지만 폭행을 당하는 바람에 그의 배 속에 있던 그 물질이 몸에 흡수되어 버린다. 그 결과 뜻하지 않게 루시는 이제 인류 최고의 지성과 능력을 지닌 존재가 되어버린다. 정확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조종하며 정신적으로 시간 여행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 유행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성질을 지닌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PH4는 실제로 6주 된 태아가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임산부의 태반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다. 영화에서는 성인이 된 루시가 그 물질로 ‘잠자고 있던’ 능력이 극대화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묻는 말에 노먼 교수는 지식의 전달을 충고한다.      


사실 그렇다. 우리 인류, 정확히 말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쯤 이 지구에 출생한 이후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보다 지식의 전달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을 낳아준 지구의 운명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이제 문자 그대로 만물의 영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럴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대부분의 인류가 자신의 불멸을 추구하기보다는 재생에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야 인류는 생존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도 역사의 모든 시대마다 이런 숙명을 거부하고 불멸을 꿈꾸는 자들이 나타났다. 중국의 진나라의 시황이 불사불멸을 꿈꾸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온다. 그러나 그런 생물학적 영생만이 아니라도 많은 정치가는 마치 영원히 살 약속을 조물주에게 얻은 모양으로 불멸의 권력과 이권을 꿈꾼다. 특히 대권과 관련해서는 거의 정신병리 수준의 집착을 보인다.     


완벽한 지식을 과연 인류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근심하는 모건 프리먼에게 루시는 지식이 아니라 무지가 혼란을 가져온다는 답을 한다. 그렇다 지금 대선 정국이 이리 어지러운 것은 대선 후보들이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리석어서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권력의 유효기간이 겨우 5년에 불과하며 그 이후에는 마구 휘두른 불법적인 권력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한 무지가 이런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자천타천으로 유력 후보가 된 이들의 면면을 보자. 대부분 60~70대 남자이다. 그들이 과연 앞으로 산다면 얼마나 더 살까? 한국 남자 평균 수명으로 계산한다면 10~20년이다. 잘 죽을 준비를 하기에도 사실 빠듯한 시간 아닌가?      


사주로 수명을 예상하는 것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점술사들의 영역이니 함부로 논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안다고 해도 천기의 누설이니 매우 조심한다. 수명의 예측을 정확히 하는 데에는 기문둔갑이 제격이지만 자평명리로도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


인류는 재생에 최적화되어 지금까지 생존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그래서 만약 인간이 인제 와서 개체의 영원한 존속 곧 불멸을 추구한다면 그 개체는 사회의 암이 되고 만다. 마치 개별 암세포가 죽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증식을 계속하면 결국 인간의 몸이라는 전체를 죽음으로 이끌 듯이 사회의 한 인간이 권력과 물욕과 성욕을 비롯한 탐욕을 무한히 추구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멸을 추구한다면 그는 사회적 암세포가 되고 만다. 

    

재생에 최적화된 인류는 조상들이 그래 왔듯이 재생의 메커니즘에서 후손들의 생존을 위한 조건의 최적화를 위한 물리적 조건과 더불어 축적된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인류의, 그리고 개인의 생존의 의미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내’가 죽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고, ‘내’가 영생을 하겠다고 권력과 물욕을 놓지 않게 되면 그는 공동체, 사회, 국가,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인간은 불멸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신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개인의 불멸을 추구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기는 하다. 그래서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이 담론의 주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 왜 불멸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않은 채, 그저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 그 ‘방법’을 찾아내어 실현하게 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그 자신은 불멸의 존재라고 스스로 부르겠지만 그 이외의 모든 인간, 나아가 지구를 포함한 우주는 그를 암세포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과연 지금 대선 후보들 가운데 누가 암세포인가? 만약 우리가 암세포를 대통령으로 뽑게 된다면 한국 사회 전체는 결국 암에 걸려 멸망하게 될 것 아닌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괜한 생각에 잠이 안 온다.      


물론 일부 생태학자들은 지구에서 인류야 말로 암적 존재라는 주장도 한다. 곧 인류를 집단화된 하나의 개체로 본다면 인류의 무한증식을 하여 다른 생명체들에게 암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 상의 그 어떤 생명체라도 무한증식을 한다면 결국 다른 종을 멸종시키는 암적 존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이 파멸한다면 결국 자연의 균형과 조화가 파괴되어 자신도 결국 멸망하게 되고. 그래서 자연은 자연의 균형과 조화를 위하여 자연의 법칙을 만들었다. 곧 특정 개체가 지나치게 번성하게 되면 결국 소멸의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도 이 균형과 조화의 법칙은 적용된다.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가 지나친 팽창주의로 권력과 물욕을 무절제하게 부리게 되면 반드시 파멸에 이르게 된다. 페르시아 제국, 로마 제국, 몽골제국, 러시아 제국, 나치 제국이 그랬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면 결국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의 길을 가게 된다.     


영화에서는 CPH4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극에 달한 루시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무자비하며 감정이 사라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현실에서 그 효소의 영향을 받지 않아 보이는 평범한 능력의 소유자도 타인에게 무자비하고 공감 능력을 상실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례가 얼마든지 발견된다. 왜일까? 사실 모든 인간은 한때 태중에서 CPH4를 흡수하며 자기의 생존의 최적화를 모색한 이기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는 여전히 장수가 커다란 복으로 여겨진다. 이른바 오복 가운데 장수가 으뜸 아닌가!     


오복(五福)은 무엇인가?     


오복은 유교의 경전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홍범(洪範九疇), 곧 9개의 정치 원리의 가장 끄트머리에 자리하는 것이다. 서경의 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訪道于箕子 禹治洪水洛出書 法而陳之為洪範九疇 至是 王訪箕子 以天道 箕子乃推衍增益 以成其篇 初 一曰 五行 次二曰 敬用五事 次三曰 農用八政 次四曰 協用五紀 次五曰 建用皇極 次六曰 又用三徳 次七曰 明用稽疑 次八曰 驗用庶徴 次九曰 嚮用五福 威用六極 箕子不欲臣周 亡于朝鮮 王因以封之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 우임금이 기자에게 정치를 묻지 이처럼 대답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오복은 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이다. 그에 반대되는 육극은 凶短折, 疾, 憂, 貧, 惡, 弱이다.   

   

중국은 워낙 3,000년 전부터 초월 세계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매우 현실적인 사상으로 무장된 나라이니 복이라고 하는 것도 그저 오래 탈 없이 잘 먹고 잘 살다가 잘 죽는 것 이상의 삶을 논하는 데에 매우 부족한 나라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이 극도로 싫어하는 것도 가난하고 병들어 약한 몸으로 추레한 꼴로 살다가 단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를 지닌 과연 인간이 그럴 수 있는가? 한 때 대한민국을 떨게 하던 전두환도 이제는 병들어 추레한 늙은이에 불과하다. 김형석은 개인적으로는 100년 넘게 편안히 살아온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의 공동선에 무슨 도움을 주었나? 기독교와 불교는 물론 지극히 현세적인 유교마저도 혼자 장수하면 잘 먹고 살 사는 것이 윤리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부자로 오래 사는 것보다 다른 이의 안녕, 궁극적으로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 어른다운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ego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판은 물론 한국 사회 전체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고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 생각에 너무 오래 절어 있어서인가? 아님 이 땅에도 초인이 어딘가 있는데 내 시력이 부족하여 못 보고 있나? 이래저래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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