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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Sep 16. 2020

누가 영생을 원하는가?

뉴에이지 이야기


영성을 공부하다가 접하게 된 책이 이른바 이집트 사자의 서와 티베트 사자의 서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내가 기독교 공부를 하면서 접하게 된 유럽 중세의 책 ‘죽는 법’(Ars moriendi)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흥미를 가지고 읽고 더 깊이 연구하게 되었다.      



사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런데도 모든 인간은 죽음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반대로 죽음을 스스로 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한 해에 약 13,000명이 자살하는데 이는 미국에서 총기 사고로 사망하는 숫자와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자살을 연구하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타의로 죽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살하는 이들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진정으로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고자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살고 싶어 자살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살하지 않는 이들의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은 더 말해서 무엇하랴? 생존 본능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이다. 그래서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인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맹목적으로 살고 싶은 의지’(blinder Wille zum Leben)를 갈파하였다. 그냥 살고 싶은 것이다. 아무 이유가 없다. 그래서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하는 사람들도 열심히 산다.     


그런데 누가 영생을 원하는가?     


Queen의 리드 보컬리스트였던 Freddie Mercury(1946-1991)가 죽기 5년 전에 발표한 노래에 ‘Who wants to live forever’가 있다. 이때 이미 AIDS에 걸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가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이기에 그 호소력이 남다르다. 1946년 인도에 사는 파르시족(Parsis)으로 당시 영국 통치령이었던 잔지바르(Zanzibar, 현재의 탄자니아 지역에 있던 이슬람 왕국)에서 태어난 그는 18세인 1964년 잔지바르의 내전을 피해 가족과 함께 영국의 미들섹스(Middlesex)로 건너가서 약관 24세에 Queen을 결성하여 전설의 가수의 길을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떠나 인도에서 공부하고 영국에서 활동한 그는 평생 이방인의 정신으로 살다 간 천재 음악가였다. 그런 그가 불혹의 나이인 40이 되어 부른 이 노래를 부를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죽음은 피하든 추구하든 모든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는 가장 절대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진시황부터 현재의 많은 과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영생의 단서를 찾고 있지만 사실 무의미한 짓이다. 1970년대 여러 과학자들이 발견하여 노벨상 수상에 이르게 한 telomere가 영생의 비밀을 찾는 고리가 될 것이라는 추론이 제기되면서 telomere의 축소를 억제하는 것이 세포의 영생을 보장하는 듯이 선전되고 있지만 인간은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한 유물론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삼라만상이 다 영고성쇠(榮枯盛衰)와 생로병사의 단계를 거쳐 변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태양마저 나이가 있다. 현재 50억 살 정도 되었는 데 그 정도 나를 더 먹는 동안 적색거성과 백색왜성의 단계를 거쳐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하물며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어찌 영생을 바라겠는가?     



그러나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가운데 유일하게 죽음을 인식하고 대상화하여 성찰할 줄 하는 존재인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 남다른 성찰을 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죽음은 특히 종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 많은 종교에서 사람들이 필연적인 죽음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오히려 죽음 후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하는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특히 기원전 1550년부터 50년까지 이집트 신왕조에서 사용되었던 ‘사자의 서’와 유럽 중세 시대의 ‘죽는 법’(Ars moriendi), 그리고 한국에 ‘티베트 사자의 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서기 8세기경에 생존한 것으로 여겨지는 파드마삼바바(པདྨ་འབྱུང་གནས)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바르 도 토스 그롤’(བར་དོ་ཐོས་གྲོལ)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심오한 성찰의 내용이 풍요하게 담긴 글들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에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린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공자와 그의 제자 계로의 대화가 나온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계로가 귀신에 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사람 섬기는 것을 잘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섬기겠나? [그러자 계로가]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그렇다. 이 세상 이치도 다 모르고 이 세상 즐거움도 다 못 누리는데 어찌 미리 귀신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죽음을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서양과 중동 그리고 인도에서는 이와는 정 반대로 오히려 매우 오래전부터 죽음 이전과 이후에 대한 성찰을 매우 깊이 해온 전통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서 죽음은 삶과 멀리 있지 않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공동묘지가 집과 될수록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만 독일만 해도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성당의 마당이 묘지이다. 그리고 유골도 성당에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극도로 혐오하는 한국의 자살률이 그런 죽음과 친숙한 문화권보다 더 높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죽음을 터부시 하지 않기에 오히려 죽음을 이해하고 삶을 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살 예방 센터에서 일하는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니 요즘 한국에서는 특히 20-30대 여성들의 자살 시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창 일할 나이의 40-50대 남자들의 자살 시도는 계속 증가 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의식 개선을 위한 마땅한 사회적 제도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에 죽음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이해하는 것도 오히려 잘 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이 시리즈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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