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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Nov 23. 2021

전두환은 지옥에 갈까?

이제 지옥에 가지 않고 처음부터 이제와 항상 지옥에 있었고 있을 것이다

전두환의 '미남' 손자 전원우가 할아버지를 지옥에서 구할까?


공항에서 체포되는 전우원 ⓒ 노컷뉴스


전두환 손자인 전원우의 외모 칭찬 보도가 줄을 있고 있다. 어느 신문은 그가 홍콩 배우처럼 생겼다고 입방아를 찧고 있을 정도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그가 유아인 보다 더 잘생겼다는 말까지 돈다. 그런데 내가 봐도 훈남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잘 생긴 것이니 말이다. 콩 심은 데 팥이 나는 일도 있나 보다. 자세히 보니 할머니 이순자의 얼굴을 더 닮았다. 다행인가?


그런데 지금 전원우는 단순히 외모만 난리가 아니다. 그가 진심으로 가족의 죄에 대하여 속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5.18 희생자들에게 용서를 빌고자 경찰에 체포될 것을 알면서도 귀국도 감행했다. 얼마 전에 뜬금없이 소셜미디어에 나와 자기 가족의 비자금을 언급하면서 용서를 비는 퍼포먼스를 펼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그런데 과연 지금 지옥에 가있을 전두환의 죄를 손자가 대신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물론 가톨릭에서는 대속의 개념이 있다. 남의 죄를 대신 갚아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예수다. 예수는 인류가 신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도록 하기 위하여 아무런 죄가 없는 데도 십자가에 매달려 대신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인 전두환의 집안사람으로 전원우도 그런 대속을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전두환이 ‘자연사’ 했다. 말년에 이런저런 병과 더불어 치매기도 있었으니 윤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기능이 상당히 마비된 채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전두환에게 성찰과 반성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리라. 이른바 잘먹고 잘 살다가 잘 죽었다.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죄를 지은 자가 그리 죽었다. 전혀 반성도 안하면서 말이다.


넷플릭스 시리즈인 <지옥>에서는 ‘천사’가 지옥에 갈 사람에게 미리 죽을 날과 시간을 고지하고 그날 그 시간이 되면 ‘저승사자’라는 괴물 셋이 나타나 그 자리에서 그를 ‘심판’한다. 대상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문자 그대로 ‘소각’해버린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그 영혼을 지옥으로 데리고 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저승사자들은 처벌을 가한 다음 그저 사라지고 만다. 과연 그 ‘죄인’은 지옥에 간 것일까?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Hellbound이니 가기는 갔겠지?


그런데 지옥이 있는 것이 맞나?


통상적으로 여러 종교에서 지옥은 죄를 지은 인간이 죽고 나서 가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 겪는 형벌은 종교에 따라 다양하다. 그런데 기독교의 경우 특별한 형벌이 없다. 예수가 묘사한 ‘지옥’은 단순하다.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는 곳이다. 성경에서는 게헤나(γαιεννα)로 불린다. 실제로 게헤나는 예루살렘 시온산 남부에 있는 계곡을 의미한다.


게헤나의 의미는 구약성경에서 ‘히놈 계곡’ 또는 ‘히놈의 자녀들의 계곡’으로 불리며 그 의미에 다양한 변화를 거친다. 유대 왕국의 왕들이 여기에서 자녀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땅은 저주받은 곳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또한 악인들이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장소로 여겨지게 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가 직접 게헤나를 언급하고 있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인 마태복음에 게헤나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가장 나중에 쓰인 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게헤나 곧 지옥에 관한 언급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지옥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 곧 다양한 육체적 고통이 가해지는 장소는 아니다.


그런데 왜 지옥이 죄지은 자가 가서 형벌을 받는 곳이 되었을까? 그것은 유럽 중세의 교회가 신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낸 상상력의 산물이다. 특히 천국과 지옥만으로는 인간이 사후에 처할 상황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하기에 부족하기에 연옥까지 만들어 냈다. 사실 예수는 천국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 천국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지옥도 마찬가지다. 그저 게헤나에 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경고했을 뿐이다. 연옥은 아예 예수가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사실 오늘날 천국, 지옥, 연옥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지나치게 오염된 개념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본질을 정확히 아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양의 기독교 신학에서도 천국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을 이루었지만 지옥과 연옥은 문학적 상상력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에 신자들을 ‘겁박’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지옥과 연옥의 개념이 무디어진 현대에 와서 지옥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마 그래서 전두환도 하늘이 무섭지 않고 지옥도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죄의 용서에 가장 필요한 참회와 보속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권선징악을 바라는 인간의 심리에서 볼 때 참으로 억울한 일이겠다. 지옥이라도 있어야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다 간 전두환과 같은 악인들이 벌을 받는다는 확신을 얻을 것이니 말이다.


신학적으로도 확신할 수 없는 지옥에 전두환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니 앞으로도 또 나올 전두환과 같은 인간에게 ‘정의의 심판’을 내리기 위해서는 지옥 말고 다른 것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무엇일까?


지옥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 악인에게 그 악행에 상응하는 형벌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없다. 신학적으로는 전두환 같은 악인마저 신은 사랑으로 감쌀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도 태어날 때 악마 같은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도 태중에 열 달 동안 고이 간직되어 지극한 모정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존재이다. 그의 악행에 대하여 법적인 제재를 가할 수 있지만 종교적 영적 차원의 형벌을 가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런데 영화 <지옥>에서는 죄를 지어 지옥에 갈 운명에 처한 인간들이 한 결 같이 숨어서, 남들에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고 죽기를 바란다. 반성하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다.


전두환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반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반성하지 않고 화내는 모습에서 그의 마음도 편치 않은 것을 알아챌 수 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자신도 분기탱천하고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저주 속에 죽어간 전두환. 그는 이미 살아서 지옥에 있었다. 지옥은 죽고 나서 가는 곳이 아니다. 마치 천국이 죽고 나서야 가는 곳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주를 받는 전두환과 그와 마찬가지로 욕을 먹은 그 주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에게 직간접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이 처한 상황이 모두 모여 지옥을 이룬다. 이 한국 사회에 전두환은 지옥을 만들어 놓았다. 단순히 1980년 5월의 광주만을 지옥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지옥은 있는 것이다. 악인의 마음과 그 주변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리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변명을 한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원망하는 마음을 지니고 사는 삶 자체가 지옥이다.


예수가 성경에서 한 말이 있다. 남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이다. 여기서 걸려 넘어지게 한다는 것은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죄는 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말한다. 신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은 사랑의 반대 행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아니라 증오, 원한, 분노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는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두환은 지옥에 있었고 지금도 지옥에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옥에 있다. 적어도 기독교 신학의 해석에서는 말이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이 아닐 수 없다.


전원우 미국 유학 시절 사진 ⓒ 뽐뿌 자유게시판


더구나 전두환은 기독교 신자이다. 흔히 그가 백담사로 줄행랑을 치고 그곳에 머물며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보고 불교 신자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의 아들 전재용도 판교의 우리들 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는 기독교 신자이다. 신학대학원도 다닌단다. 그러니 그런 집안의 전두환에게 기독교의 신이 마련한 적절한 자리가 있을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가 아무런 사과도 않고 떠났다고 분기탱천할 필요가 없다. 신이 어련히 다 알아서 하실까? 만약 무늬만 기독교 신자였다면?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불교에서는 훨씬 더 정밀한 지옥문이 마련되어 있으니 더 속이 후련한 일이 벌어질 텐데. 걱정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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