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Jan 19. 2022

이른바 ‘김건희 신드롬’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고?

분노를 다스릴 ‘찐 도사’가 필요한 시대이다.

MBC가 김건희의 7시간이 넘는 통화 녹취록이라는 좋은 재료를 받고도 요리를 제대로 못해 비난을 받는 가운데 오히려 보수 진영에 기운 세계일보가 치고 나오고 있다. 아무래도 ‘MBC 직원’이라는 것이 포기하기엔 아까운 것이었으리라. 그러니 몸조심할 밖에. 대선이라는 것도 어차피 지나갈 바람이고, 바람만 피하면 고액 연봉에 화려하고 안락한 ‘방송사 직원’으로 계속 살 수 있는데 미쳤다고 자살 행위를 하겠는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과거의 시사고발 프로의 선봉에 선 MBC가 더 이상 아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동안 노골적으로 친 윤석열의 행보를 보이던 세계일보가 이른바 ‘건진 법사’로 문자 그대로 ‘한 건’ 건진 모양이다. 이런 것을 영어로도 scoop라고 하니 국자로 건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MBC가 죽을 쑨 덕분에 오히려 이런 주변의 언론들이 김건희의 통화 내역을 공개하는 데 더 열을 내게 된 모양새이다. MBC가 변죽을 울리며 판을 깔아주었으니 이제 나머지는 김건희를 물어뜯는 과정만 남은 것인가? 그러나 오히려 김건희의 인기가 더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그 여러 소란스러운 말들 가운데 ‘건진 법사’가 내 귀에 솔깃하게 들어온다. 아무래도 점술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아 그런가 보다.


그런데 이 도사와 관련된 단체가 했다는 ‘짓’을 보니 괴이쩍은 정도가 아니라 악령의 작용으로 밖에 생각이 안 들 정도이다. 살아 있는 소의 머리와 발끝만 남기고 가죽을 벗겨 제물로 바친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었다.(참고: https://news.v.daum.net/v/20220117174515675) 모자이크로 처리되었지만 그 ‘몰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의식은 2018년 9월 9일 충주 중앙탑공원에서 열린 '2018년 수륙대재 및 국태민안 등불축제'에서 거행된 것이란다. 그리고 일광 조계종이 주최하고 대한불교 종정협의회가 주관한 관련 의식은 세계소방관경기대회를 안전하게 개최하고 충주시 경제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단다. 그런데 이런 단체에 속한 자가 지금 윤석열의 아내와 어느 모로 관계가 있다고 한다니 호기심이 발동할 수밖에. 게다가 세계일보에 보도된 것을 보니 이 건진 도사가 윤석열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윤석열이 소로 보였나? 그저 이리저리 끌어도 되는.(참조: https://news.v.daum.net/v/20220117172146748)  


그런데 언론에서는 김건희의 ‘당찬’ 발언을 놓고 국민들이 ‘걸 크러쉬’에 빠지고 있다고 설레발을 친다. 그러더니 아예 후보를 김건희로 바꾸자는 말도 나온다. 그리고 MBC의 김건희 관련 보도 이후 오히려 김건희는 윤석열의 당선에 희망의 등불이 된다는 기사가 조중동을 중심으로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다. 지금껏 나는 박정희 시대부터 시작하여 여러 대선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런 지경에 이르는 경우는 처음 본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김건희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귀찮지만 논지를 전개하려니 어쩔 수 없이 따라 적게 된다. 이 ‘도사’와 관련된 것이어서 말이다. 지금껏 윤석열도 존경한다는 천공부터 시작하여 항문 침 도사를 거쳐 이제는 소 잡이 도사까지... 한국의 도사란 도사는 다 출현할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김건희는 무당이 필요 없단다. 그 이유가 자신이 점을 더 잘 보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발달된 존재이고 윤석열도 영적 존재라서 만나게 되었단다. 정말로 이른바 ‘최순실 V. 2,’ 아니 최순실의 원전을 보는 느낌이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지 뉴스에도 그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를 좌지우지했던 그 우주의 영을 끌어 모으던 바로 그 여자 말이다.


한 사람의 여자로 한 나라 전체가 미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증명이 된 사실이다. 측천무후와 양귀비만이 아니라 최근세사에도 있던 일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에 누구 하나 나서서 ‘네 이 X! 어찌 고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느냐! 경거망동을 멈추지 못하겠느냐!’ 이런 호통을 치는 ‘어른’이 없었다. 그저 자기 살길을 찾아 눈치만 보며 이리저리 웅숭그리며 중얼대기만 했다. 그러데 그런 역사가 21세기 한국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참으로 한심한 세상이다. 정치계의 도사인 척하는 김종인도 조용하고 그리고 수시로 때로는 필요 없는 상황에서조차 늘 입을 놀려대던 이른바 ‘진 석사’도 겨우 안희정에 관한 발언에 대해 ‘공익 어쩌고...’ 할 뿐 나머지 내용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다.


그리고 페미니즘의 대표인 척하던 이수정도 김건희를 대신하여 사과를 하고는 아예 윤석열 사단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성상납 추문 이후 철저히 ‘로우 키’를 유지하고 윤석열의 충견을 자처하고 있는 이준석은 아예 김건희 찬가를 불러대고 있다. 이제 이 나라에서 목에 힘주던 사람들 모두 김건희라는 ‘여자’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형상이다. 그의 팬클럽에서 말하는 대로 이제 김건희는 원더우먼이 될 모양이다. 조금 있으면 슈퍼맨과 나란히 선 슈퍼우먼이 되겠다 싶을 정도이다. 김건희가 단지 윤석열의 아내로 호가호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여자의 무논리에 맞서 논리적으로 반박할 어른이 없는 것이다. 그저 김건희 주변에 모여 아양 떠는 내시들만 가득하다. 이러니 한국 남자들이 도매금에 무시당하는 세상이 된 것 아니겠는가? 한반도에서 사내다운 사내를 이리도 찾기 어려운 일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도 사나이 대장부가 어딘가 숨어 있다고? 그럴 리가. 김영삼 말대로 대도는 무문 아니던가? 또한 공자가 말한 대로 덕불고인 법이거늘.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5천만 인구 가운데 ‘대장부’가 단 한 명도 없는 나라가 세상에 또 있을까?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가부장제도가 아직도 서슬이 퍼런 이 나라에서 말이다. 설사 대장부가 정말로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이유를 도대체 알 수 없다.


물론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당황해서일 것이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나대는’ 대선 후보의 아내를 일찍이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말하는 내용이 상식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식하다의 차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안드로메다이다. 사실 그 내용은 일반 저잣거리에서 또는 카페에서 ‘아줌마’들이 나누는 ‘카더라 통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도 말이다. 김건희의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품평’은 새삼스럽지 않다. 조국에 대한 이야기도 누구나 다 아는 수준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론이 마치 이런 이야기가 기상천외한 것이나 되는 듯 과장해서 퍼 나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김건희만의 잘못이 아니라 이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이 문제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김건희에게 이른바 ‘걸 크러쉬’를 느끼고, 더 나아가 결국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냐.’는 논리가 현재 한국 사회에 먹혀들고 있다. 허무와 조소가 판치고 있다. 게다가 제정일치 시대의 정권에서나 볼법한 주술사와 마술사들의 정치 개입이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버젓하게 말이다. 사실 늘 말하는 대로 정치가들은 매우 약한 존재들이다. 언제 자신의 권력과 영화가 사라지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될지를 전혀 알 수 없기에 좋다는 것에는 다 매달리고자 한다. 일반 사람도 마찬가지로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정치가들은 특히 그 부침이 심하다. 권력의 정점에서 독재를 휘두르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물론 근래에 이명박과 박근혜에서 그 생생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요술을 부려서라도 권력과 영화를 보장받고 싶을 마음이 굴뚝같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명박의 ‘무릎 기도’도, 박근혜의 ‘우주의 기’도 그들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니 소 한 마리를 잡아 바친다고 해도 별무소득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소인가? 사실 인류 역사에서 소만이 제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다양한 동물은 물론 사람도 인간의 탐욕을 위하여 희생 제물이 되었다. 또한 신탁도 인류 역사에서 매우 오랫동안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사실 오늘날 ‘정상적인’ 종교로 자리매김을 한 기독교에서는 여전히 예수가 인류를 위하여 어린양처럼 희생제물이 된 것을 기념하는 예식을 오늘날에도 거행하고 있다. 그것이 미사든 예배든 관계없이 말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희생에는 다음과 같은 뜻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천지신명 따위에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바치는, 산 짐승. 주로 소, 양, 돼지 따위를 바친다. ≒뇌생, 생뢰, 전희, 희생물.”


희생 또는 희생제물을 영어로 sacrifice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라틴어 sacrificium이다. 이 단어는 ‘거룩한 것’이라는 의미의 명사 sacra와 ‘행하다’라는 뜻의 facere의 합성어이다. 결국 희생은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주로 종교에서 정결한 희생 제물을 신에게 바치며 인간의 피흉추길을 비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인간, 특히 권력자의 매우 이기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다. 곧 내가 살고자 다른 동물 더 나아가 다른 인간도 희생시키고자 하는 생존본능에 충실한 행위일 뿐이다. 이러한 이기주의가 낯 뜨거운 것이기에 권력자들이 신의 의지까지 개입시켜 거룩한 행위로 둔갑을 시킨 것뿐이다. 게다가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할 줄 아는 것이 죄짓는 일 밖에 없는데 신과 그의 외아들이 그런 죄 많은 인간을 너무 사랑하여, 인간이 요구하지도 않은 대속, 곧 대신 희생을 하면서까지 거저 구원을 해준다는 교리까지 만들어 내었다. 인간은 뼛 속까지 누군가 자기를 대신해서 죽어주기를 바라는 이기주의에 철저히 물든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신의 외아들도 거침없이 희생제물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재물을 바치는 제사는 고대 그리스와 중동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인신공양의 풍습이 있었다. 신라도 이를 모방하여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남미의 인신공양은 사실로 밝혀졌다. 이렇게 다양한 문화권에서 제사와 의식으로 사람을 바쳤다. 신라에서는 성벽을 쌓을 때에도 노예와 백성을 잡아 죽여 성벽 안에 묻었다. 그 성으로 권력자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명분은 신에게 공물을 바쳐 존경을 표하고 분노를 달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유지와 지상에서의 부귀영화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전통’이 2천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이 한반도에 남아 있다. 더구나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자와 그의 아내가 바로 그 ‘전통’ 한가운데 서 있다.


김건희의 이른바 박사 논문이 관상을 주제로 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천하가 다 알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그의 여러 잡스러운 논문의 주제도 역시 주로 궁합과 사주이다. 그래서 이번 녹취록에 나온 대로 자신이 점을 볼 줄 안다고 큰소리를 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논문 수준을 볼 때 김건희가 결코 점을 잘 칠 리가 없다. 나도 나름 그 ‘점’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명리학이든 기문둔갑이든 자미두수든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수준의 ‘논문’을 쓰지 못한다. 아니 안 쓴다. 한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고 했다. 그래서 김건희 주변에 모여드는 이른바 ‘도사들’의 수준을 보면 김건희의 점에 대한 ‘식견’이 저절로 보인다.


도사 문제가 불거지자 윤석열과 윤핵관이 서둘러 그 도사만이 아니라 관련 조직마저 단칼에 없애는 모양새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도사’ 문제가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김건희 스스로 호언한 대로 자신이 영적인 사람이고 윤석열마저 영적인 존재이니 말이다. 그들이 도사 자체란 말 아닌가? 참으로 경이롭다.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이 제사장과 권력자가 한 사람인 제정일치 시대로 회귀할 모양이니 말이다.


김건희 스스로 이야기 한 대로 자신은 나이트클럽 같이 시끄러운데 싫어하고 하루 종일 클래식만 틀어 놓고 도사들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 ‘삶은 무엇인가’ 이런 이야기 하는 걸 좋아하니 윤석열이 대선에 당선되면 이제 청와대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도사들의 강연이 진행될 수도 있겠다. 배경음악은 무엇이 좋을까? Mozart의 Requiem? 참으로 오묘한 조합이다. 원래 ‘도사’는 중국의 도교에서 시작되어 한국에 들어와 토속종교와 결합된 일종의 혼합주의적 존재이고, 클래식 음악은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계몽주의를 전후로 한 16~18세기에 집중적으로 생산된 것인데(사실 클래식은 콩글리쉬이다. 원래는 classical music이 맞는 표현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표현을 Yuji 한다고 누가 탓하랴!) 이 둘이 조화를 이룬 방 안에서 진행되는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의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을까? 일찍이 문선명의 통일교에서 추구했던 동서양의 사상과 종교의 통일의 완성이 드디어 김건희의 ‘방’에서 이루어질 모양이다.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건희의 ‘무지’와 ‘천박함’을 지적하고 손가락질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에게는 죄가 없다. 평생 기생충만 만지다가 요즘 정치를 주무르려고 애쓰는 서민이라는 사람이 말 한 대로 김건희는 ‘허당끼’ 있는 순진한 여자일 수 있어 보인다. 서민은 김건희가 윤석열에 대하여 ‘멍청해도 말이라도 잘 들으니까 내가 데리고 살지’라고 말한 것을 두고 ‘인간미가 넘친다.’고 교언영색을 해댄다. 그러면서 서민은 반대로 이재명과 김혜경 부부가 아침마다 키스한다는 것을 두고 ‘정신병 아니면 구라’라고 단언한다. 기생충을 많이 보다 보면 남의 부부의 심리도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훤히 보이나 보다. 아니면 서민도 드디어 ‘도사’의 반열에 오른 것인가? 그것도 아님 어지간히도 ‘자리’가 탐나는 것인가? 그러나 윤핵관이 잡고 있으니 언감생심 아니겠는가? 그런데 양념으로 서민은 아예 조국까지 ‘내로남불’의 위선자로 몰아간다. 왜 이럴까?


그러나 내 생각에 이런 서민이라는 닝겐의 언행이 바로 우리나라의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의 반영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의식이 바로 김건희에 대한 ‘인기 몰이’의 근본 원인이다. 김건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변명은 간단하다. 이른바 ‘조신한 여자’ 답지 않고 여장부처럼 걸걸하고 솔직하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걸 크러쉬’하고 싶단다. 맞는 말이다. 그동안 이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모순적 상황에 대한 반발이 이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평등 사회로 넘어가는 카오스적인 과도기 현상이 한국의 지금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 분노한 여성들의 이른바 ‘감정 배설’이,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하여 전혀 필터링이 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도 가난한 집 출신의 학력은 보잘것없어도 예쁘장하고 똑똑한 여직원이 얼굴은 잘 생기고 키도 무척 크고 외국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멍청하고 말썽만 부리는 이사님, 실장님, 변호사님, 그리고 심지어 검사님도 휘어잡는 이야기만 넘치고 있다. 그리고 외모가 이른바 ‘미인’과 전혀 거리가 먼 여자 진행자가 상소리에 가까운 거친 말투로 남자의 외모를 평가하고 비웃고 돈 자랑하고 멋대로 구는 잡담 프로그램도 넘쳐난다. 이런 프로그램이 넘치는 이유는 간단하다. 거짓으로라도 여자가 언행을 ‘멋대로’ 하고 남자를 지배하면 시청률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왜 이런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올라가는가? 당연히 분노하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건희의 ‘인기’도 이러한 집단의식과 시대정신의 연장선상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윤석열에 대한 지지 기반이 현 정부에 대한 분노에 기반한 것처럼 김건희의 인기도 여성 차별에 대한 분노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분노는 반드시 임계점에 이르러고 대폭발을 해야만 그 기세가 줄어들게 된다. 어쭙잖게 억누르면 더욱 그 기세만 등등해질 뿐이다. 서양의 경우 이는 보통 혁명으로 해소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독일 농민혁명, 소련 볼셰비키 혁명처럼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4.19, 5.18, 6.10, 그리고 박근혜를 몰아낸 촛불 혁명이 있다.


이러한 분노가 넘치는 사회에서 김건희를 ‘조롱’하면 오히려 그런 분노의 기세가 더욱 강해질 뿐이다. 그런데 민주당과 이른바 좌파 세력은 김건희의 희화화에만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잘못된 접근법이다. 마치 김건희만 ‘제거’하면 윤석열의 당선을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정말로 완전히 헛짚고 있다. 김건희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그러니 이른바 ‘김건희 신드롬’, 더 나아가 ‘윤석열 신드롬’을 막으려면 그런 결과를 야기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 원인이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 ‘분노’다. 그런데 현재 그 분노의 주체가 너무 다양하다. 미래가 불안한 이대남, 가부장제도에 희생당한 여성, 좌파의 ‘내로남불’에 좌절한 보수가 모두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가 워낙 다양하여 쾌도난마식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그 분노를 임시방편으로 윤석열과 김건희를 내세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노한 이들에게는 윤석열과 김건희가 너무 고마운 존재이다. 그들의 분노를 대신해서 표출해주는, 그것도 ‘저질스럽게’ 속시원히 표현해 주어서 눈물 날 정도로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이들에게 당장 해결은 필요 없다. 분노를 표현만이라도 해주면 고마운 것이다. 그것도 막말이면 더 좋다. 그들이 이해하는 언어 수준이어서 속이 다 시원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재명의 참모들은 아직도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몸조심만 하고 있다. 조심조심 어름 위를 걸어가는 형상이다. 그러면 고지에 이른다고 생각하는가? 김건희를 희화화하고 제거해도 이 분노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또 다른 윤석열, 또 다른 김건희가 계속 나타날 것인데도 말이다. 과연 이 ‘천박한 분노’를 다스려 ‘거룩한 분노’로 승화시킬 ‘찐 도사’는 누구일까? 이재명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으려면 어찌해야 하나?

작가의 이전글 정용진의 '멸공!'과 자유는 Made in Kore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